2002년 여름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아들이 병역을 면제받은 데 의혹이 있다는 '병풍'이 정치쟁점이 된 가운데 대통령 직속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에서는 허원근 일병이 고참사병의 우발적인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고 폭로하였다. 군대가 조직적으로 자살을 조작하고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어느 부모가 이런 군대에 귀한 자식을 보내려 하겠느냐며 야당 대통령 후보의 입장을 두둔하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이미 사건이 발생한지 20년이 다된 터에 진실발견이 지난(至難)할 것임은 분명한데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여기에는 이해를 따지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허 일병 사건과 비슷한 헐리우드 영화가 국내 상영되어 아주 유력한 해결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키스 더 걸>, <스파이더 게임> 등으로 함께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던 애슐리 주드와 모건 프리먼 주연의 <하이 크라임>(High Crimes: 감독 칼 프랭클린)이라는 영화이다. 단수형의 <하이크라임>(High Crime)은 프랑코 네로 주연의 이탈리아의 범죄수사 영화(1973)이다.
영화의 줄거리
1988년 엘사바도르 라스콜리나스 지역에서 반군 또는 미군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양민 학살사건이 발생한다. 그로부터 12년 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고급주택에 괴한들이 침입하였다가 인기척을 듣고 도주한다. 이 집의 여주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나가는 클레어 큐빅 변호사(애슐리 주드)이다. 해병대 출신인 남편 톰 큐빅(제임스 카비젤)과 아이를 갖기 위해서 배란일까지 체크하는 등 모든 일에 열성적인 커리어 우먼이다.
그녀가 남편과 크리스마스 쇼핑을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 남편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FBI 특수수사대에 의해 체포된다. 그녀는 변호사답게 FBI 지부를 찾아가서 과잉 체포행위였다고 항의하지만, 남편의 본명은 로날드 채프먼으로 10년 이상 도망자 생활을 하였으며 이 사건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해병대 관할사건이라는 말에 맥이 탁 풀린다.
그녀는 채프먼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LA 남쪽 교외의 성 나사로 해병기지를 찾아간다. 면회소에 나타난 남편이 손·발에 수갑이 채인 속옷 차림인 것을 보고 대경실색하는데 군 교도관은 자살방지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당연히 변호사로서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군사법정에 대우개선을 청원하겠다고 하자, 그녀의 남편은 "나로서는 별 도리가 없었어. 허지만 나는 결백해" 하고 눈물로 호소한다. 변호인이라고 나타난 신참 중위가 못 미더운 그녀는 소속 로펌에 해병대 출신으로 군사재판에서 승소한 경험이 있는 변호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다.
군 검찰의 기소장을 보니 그녀의 남편은 탈영과 상관 폭행 경력이 있고 8명의 양민을 살해한 죄목이 열거되어 있다. 남편의 설명을 듣고 상황을 재구성해본 결과 엘살바도르 폭탄 테러로 미국의 여행자들이 살해당하자 테러를 자행한 반군 두목을 검거하기 위해 라스콜리나스 지역의 마을을 수색하던 해병대원들이 무고한 양민을 살해하였는데 그 주범으로서 남편이 지목된 것임을 알게 된다. 머리가 좋은 그녀는 그 당시에 수색대에는 기지 영창에서 그녀를 보고 아는 체 한 헤르난데스 소령이 있었고 지휘관은 막스 장군이었으며, 그들이 이번 군사재판에 간여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로펌에서 소개해준 찰리 그라임즈 변호사(모건 프리먼)는 보기에도 한물 간 알콜에 찌든 나이 많은 변호사이다. 그의 첫 마디는 "[민간]사회의 정의가 군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며 차라리 유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낮추는 협상을 하라고 충고한다. 아무튼 그녀와 그라임즈는 공동 변호인으로서 군법회의에 임하기로 한다.
군 검찰관은 유능하다고 소문난 월드런 소령이고, 재판장은 전역을 목전에 둔 고참대령이다. 변호인은 신출내기이고 재판장은 항소심에서 뒤집어지더라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처지이니 재판의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다. 공판전 심리에서 미 헌법 수정 6조(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들먹이는 변호인단은 한 사람은 정석대로, 다른 한 사람은 단순무식하게 나오는 등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검찰관이 재판장에게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건이므로 재판내용을 언론에 공개하지 말도록 변호인에게 명령해줄 것을 신청한다. 이에 변호인단은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통지로 받아들이겠노라고 응수한다.
그라임즈 변호사는 직감적으로 채프먼을 범인으로 지목한 수색작전에 참여했던 해병대원들의 뒷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월드런 소령은 우발적인 사고로 보아 5년 형 정도로 끝내자고 제안하지만 채프먼은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서는 단 5분도 살 수 없다"며 울부짖는다. 남편의 무죄를 확신한 클레어는 소송전략을 짠다. 첫 번째는 검찰측 증인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반대신문을 통하여 수사에 오류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군 수사관이 제대로 사실을 파헤치지 않았음을 폭로하고, 특수부대 요원들은 거짓말 탐지기를 속이는 훈련도 받았으니 서로 짜고 진술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채프먼이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를 받았지만 결백하다는 그의 주장도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클레어와 그라임즈에 대한 은근한 협박과 폭행이 잇따른다. 양민학살 사건의 주모자 격인 헤르난데스 소령과 검찰관인 월드런 소령을 술집에서 정탐하던 그라임즈는 다른 미군병사들에 의해 몰매를 맞고 쫒겨난다. 더욱이 변호인단의 동태가 낱낱이 감시되고 있음을 느낀 클레어는 변호인 엠브리 중위가 내통한 것이라 믿고 그를 쫓아낸다.
그라임즈 변호사는 유력한 검찰측 증인인 전 부대원 에봇이 증언하러 나오기 전에 모텔로 찾아간다. 그리고 에봇이 기지촌 창녀들과 어울리면서 상관으로부터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더라도 자신의 장래를 위해 보았다고 말하라"고 은근한 협박을 받았음을 실토하게 하고 이를 비밀리에 녹취한다. 그 다음날의 군사법정에서 검찰측 증인인 에봇이 결석한 가운데 변호인단은 득의만면하여 녹음 테이프를 증거물로 제출하지만 재판장은 본인의 진술이 없는 한 녹음 테이프를 증거로서 채택할 수 없다며 기각한다.
크게 실망한 클레어는 작전을 바꾸어 LA의 한 호텔에서 막스 장군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막스 장군이 그녀를 냉대하자 클레어는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아내이자 변호인으로서 남편의 구명에 나선 그녀를 도와 진실을 아는 사람이 밝혀달라고 호소한다. 얼마 후 그녀 앞에 수상쩍은 살바도르 사람이 나타나 그녀를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는 그녀에게 살바도르인은 자신이 12년 전에 목격한 사건을 그대로 말해준다. 미국 여행자가 죽은 폭발 사고는 헤르난데스가 반군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해 저지른 사건이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라스콜리나스 마을을 수색한 것이고 헤르난데스가 눈을 다친 것도 그 사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클레어와 그라임즈에 대한 위협은 더욱 노골화되어 그들의 차는 전복되고 클레어는 유산을 하고 만다. 감방 안에서 채프먼은 더욱 괴로워하고, 클레어는 엄마의 자격도 없으니 죽고 싶다고 말한다. 이때 목에 가벼운 부상을 입은 그라임즈 변호사는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서자고 그녀를 격려한다. 다음 작전은 헤르난데스가 폭발사고 때 다친 눈을 치료하면서 보험기록을 남겼을 터이므로 이것을 조사하는 일이다. FBI 지국장을 통해 가까스로 서류를 입수한 클레어는 해병대 자선파티에서 막스 장군을 만나 모든 사실을 폭로할 테니 남편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든지 법정에 설 각오를 하라고 다그친다.
군 검찰이 변호인의 월권행위를 문제삼아 변호인 자격 박탈을 신청하려는 찰나 국방부로부터 이번 사건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기로 했다는 결정이 통보된다. 클레어와 채프먼은 감격의 포옹을 하고 "우리가 이겼다"고 환호한다. 그러나 아직 해피엔딩은 이르다. 멕시코로 작전참가 해병대원의 처를 만난 그라임즈 변호사가 뜻밖의 소식을 전해오는데 유력한 증인인 전 부대원들을 차례로 살해한 복면을 한 범인은 총을 양손으로 까부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컴퓨터 일정관리표에서 남편의 출장기록을 살펴보던 클레어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그때 마침 남편의 구명보다 진실을 밝혀주기를 원했던 살바도르인이 나타나면서 사태는 반전된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를 보노라면 9월 16일로 1년 9개월의 법정 활동시한을 마감한 우리나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함께 여러 편의 영화가 오버랩된다. 본란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어 퓨 굿맨>, <시고니 위버의 진실>(원제: 죽음과 소녀) 등이 그것이다. 영화에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현실 속에서의 진실은 안개에 가려진 채 아슴푸레하게 남아 있다.
의문사 허 일병 사건만 해도 그렇다.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을 조사한 끝에 내린 결론임에도 정부 당국이나 언론에서는 하나의 추리소설로 인식할 뿐이다. 진상규명위는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에 의해 태생적으로 수사권이 없는 데다 증언에 불응해도, 허위증언을 해도 이를 제재할 수 없는 까닭에 규명위의 실체적 진실발견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다. 비록 정권이 바뀌었다 해도 계속성을 갖는 조직의 생리상 조직의 기반 내지 결속력을 해치는 조직 구성원의 양심선언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영화 속에서처럼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비디오 테이프<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공군기지의 항공기 탑승예정자 명단<어 퓨 굿맨>, 의료보험처리 기록<하이 크라임> 같은 것을 진실발견자(fact finder)가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우리나라의 의문사진상규명위와 같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페루 등의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주력한 것은 실체적 진실발견이라기보다 중산층 내지 사회 본류에 속한 시민들이 무감각했던 양심의 소리, 도덕성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미 공소시효도 지나버린 사건을 되살려 누구를 처벌하기보다는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 유가족의 원한을 씻어주는 것이 더 시급할지 모른다. 이 영화 역시 군법회의에서 누구를 처벌하기보다는 공소를 취하함으로써 더 이상 문제삼지 않는 것을 최선의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사실 <시고니 위버의 진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가혹행위의 가해자가 의식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진실을 왜곡하여 자기 편할 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더 이상 법 개정을 못해 그 활동을 종료한 우리나라 진상규명위는 우리 국민들의 양심과 도덕성을 환기시키고 서슬 시퍼렇던 공권력 담당자도 언젠가는 법과 양심에 따른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준 것만으로도 그 사명을 다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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