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색채의 마술사' 임직순 전시회

Whitman Park 2022. 6. 19. 06:00

※ 광주시립미술관은 2022. 4. 19부터 6. 23까지 광주미술 아카이브전(Archive展)의 일환으로 운창 임직순(雲昌 任直淳, 1921~1996) 화백의 작품 전시회를 열고 있다. 빛고을의 미술 발전에 큰 획을 그었던 임직순 화백의 회화작품은 물론 드로잉, 사진, 비디오, 전시회 방명록과 리플렛, 신문기사, 편지까지 소장가와 유족의 협조를 얻어 작가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하 젊은 세대의 궁금증을 덜어주기 위해 인터뷰 형식으로 이번 전시회의 의미와 미술사적 가치 등 이모저모를 알아본다. Foreign lovers of Korean fine arts are cordially invited to visit the article of the same content in English.

 

* 광주시립미술관
* 일본 미술학교의 졸업장 (1942. 9. 26)

 

Q : 임직순 화백은 충청도 괴산 출신인데 광주와는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가?

A :  운창 선생은 1961년 한창 나이에 조선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하여 14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와 전남은 서양화 부문에서는 존재감이 별로 없었는데 같은 대학 오지호 교수와 함께 남도(南道)[1]의 자연스러운 색채를 강조하는 구상화 화풍을 일으켜 크게 발전시켰다.

 

Q : 고인은 근대화가 빨랐던 도회지도 아닌 충청도 벽촌 출신이었음에도 어떻게 중학생 때부터 도쿄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나?

A : 그렇다. 운창의 부친은 시골 군청에서 일했고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 그런데 운창이 열 살 때 서울로 이사했으며 그가 사환으로 일하던 옹기점 주인이 그의 소질을 알아보고 일본 유학을 권했다. 그분이 여비와 학자금을 일부 보태줬지만 나머지는 운창과 그 가족의 몫이었다. 운창은 도쿄에 가서 야간 학교를 다니면서 낮에는 돈을 벌어야 했고, 한국에 있는 모친도 일본 가정집에서 청소 일을 하는 등 학비를 대느라 애쓰셨다. 

 

Q : 일본 유학은 얼마나 성과가 있었나?

A : 1939년 일본미술학교 유화과(油畵科)에 들어가 재학 중이던 1940년과 1941년 잇달아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일본미술학교를 1942년 졸업한 임직순은 1943년 귀국한 후 1946년 인천여고, 서울여상, 1956년부터는 숙명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 운창이 초기에 즐겨 그린 의자에 앉은 여인의 좌상(座像)
* 가을과 여인 (1974)

 

Q : 그림의 소재로 젊은 여성, 꽃을 즐겨 그렸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

A : 카메라맨이 그러하듯이 화가도 주변에 아름다움(美感)을 느끼는 대상이 있으면 화폭에 옮기고 싶어 한다. 임직순은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과외시간에는 학생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학생들 역시 기꺼이 존경하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꽃그림 속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천경자 화백과의 인연이 화제가 되었는데 그것은 임 화백이 1974년 광주를 떠나기 전에 그린 '가을과 여인'이란 그림이었다.[2] 단풍이 든 노란 잎과 붉은 꽃에 둘러싸여 주홍빛 블라우스 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인은 임 화백의 조선대 미술교육과 제자였다. 평소 모범생이고 얌전한 여학생이어서 망설임 끝에 작업을 도와달라고 말을 꺼냈다. 장소는 작가가 광주에 처음 장만해 직접 지은 무등산이 바라다 보이는 학운동 자택 뜨락의 석류나무 아래였다. 이 작품은 일본과 프랑스에서 보고 느낀 구상회화의 자유분방한 색채주의 영향을 받아 강렬하면서도 내면의 주관성을 드러낸 색감 묘사가 뛰어나 보인다.

 

* 책을 든 여인 (1979)
* 꽃과 여인 (1985)

 

Q : 운창의 경력을 보면 국전 등 공모전에 입상[3]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미술교사 → 미술대학 교수 →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마다 무슨 전기(轉機)가 있었는가?

A : 박완서의 《나목(裸木)》을 통해 박수근 화백의 경우가 많이 알려졌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화가로서 그림만 그려서는 생계유지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운창의 경우엔 행운이 잇달았다. 숙명여고에 재직 시에는 미술반 학생들이 모델을 자청하여 그 시기의 작품 중에는 소녀 좌상이 많았다. 조선대 교수 시절에는 남도 일원으로 학생들과 사생(寫生) 실습을 다니면서 무등산, 여수항, 송광사 등 사실적인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전업작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실로 우연히 이루어졌다.

 

* 운창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즐겨 그렸던 꽃 그림 정물(靜物)

 

Q : 공모전 대상(大賞) 말고 무슨 극적인 사건이 있었는가? 아니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독지가를 만나게 된 것인가?

A : 외국의 미술사를 보아도 중세의 교회, 왕족이나 귀족 등 유력한 후원자가 사라진 뒤에는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구매하는 컬렉터들이 많이 나와야 미술이 발달할 수 있었다. 사실 19세기 후반 빈센트 반 고흐만 해도 생전에는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아 고생이 많지 않았는가! 운창의 경우 국전 입상[3] 및 추천작가라는 실력 덕분에 전시회가 열리면 크게 인기를 모았다.

 

Q : 그러한 사정은 우리의 경제사정이나 국민소득 수준이 크게 향상된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는데 무슨 특이점이 있었는가?

A : 운창의 경우 그의 인품이 그림에도 반영되어 색채에 대한 감각이나 표현방식을 좋아하는 독지가를 만난 것이 크나큰 행운이었다. 1968년 운창의 개인전이 서울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렸을 때 미쓰비시 상사 서울지사장으로 와 있던 나카가와(中川忍一) 씨가 그의 그림에 매료되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평생 교류를 하면서, 1972년 12월에는 도쿄 시모무라 화랑(下村畵廊)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를 통해 일본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미쓰비시 유럽 지사장으로 부임한 나카가와 사장이 도불유학을 주선하였다. 1973년 5월부터 1년 가까이 유럽에 체류하면서 현지의 화풍을 섭렵하고 작품활동을 벌여 임직순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팔린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 운창의 풍경화에 자주 나오는 배경의 山은 광주 시내에서 바라다 보이는 무등산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 광주 도시고속도로를 경유해 시립미술관으로 갈 때 바라다 보이는 무등산

 

Q : 이번 전시회를 보면 전시홀 별로 벽면의 색채부터 구분을 지었는데 어떻게 구분한 것인가?

A : 작품의 전시는 시기별 대표 작품과 작업 방식의 변화에 착안하여 1950년대~1970년대 초: '색채 속에서 피어나고 색채 속으로 스민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찬란한 색채의 집합',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시각적 진실 넘어 내면적 화음'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조금만 유의해서 보면 어딘지 모르게 화풍(畵風)이 시각(視覺)에서 심각(心覺)으로 바뀌어 갔음을 알 수 있다.  

 

* 전시회의 작품 주제별로 전시홀의 벽면 색깔을 달리 했다.

 

Q : 이번 전시회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운창의 작품을 대할 때 어느 점에 주목해서 보아야 할지 도움말을 해준다면?

A : 미술의 문외한일지라도 운창의 그림을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색채의 마술사'라는 호칭답게 꽃 그림이든, 소녀 좌상이든, 풍경화든 사실적이면서도 색채와 붓 터치가 강렬하다. 후기로 갈 수록 추상성이 가미된다. 예를 들어 송광사 그림은 푸른 기와가 노란 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어 보름달빛에 기와지붕이 빛나는구나 쉬 짐작할 수 있다. 말년에 그린 소나무 그림은 군더더기를 모두 제거한 미니멀리즘의 경지에 이르렀다. 소나무 같기도 한 것이 아닌 것이 우리의 세상 살이를 성찰하도록 일깨워주는 것 같다.

 

 

Q : 이번 아카이브전 특색에 맞게 미술관 소장 작품 외에 국내 소장가들의 협조를 많이 받았는가?

A : 운창은 말년까지 매우 왕성게 작품활동[4]을 벌였다. 기획의도에 맞는 협조에 깊이 감사드린다. 고인이 생전에 전시회를 많이 열었던 현대화랑의 소장품도 있고, 무엇보다 유족들이 회화와 드로잉, 졸업장 등 기록물을 많이 빌려주셨다. 운창의 작품을 수십 점 소장하고 있던 이건희 컬렉션에서 광주와 관련있는 작품을 일부 기증받은 것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만, 이번에는 고인의 작품을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 나카가와 유족의 소장품 등 해외에 산재한 작품까지 모으지는 못했다.

 

* 미술관 큐레이터(왼편에서 두번째)의 해설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Q : 이번 전시회를 통해 무슨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는가?

A : 광주시립미술관의 야심적인 기획전으로 전국적인 매스컴의 조명을 받았고, 폐막에 즈음해서는 운창의 제자들과 남도 화단의 중진들이 모여 학술 세미나[4]를 열 계획이다. 광주시립미술관은 호남고속도로의 서광주 나들목에 가까이 있어 접근성도 좋고[5] 비엔날레 전시관, 민속박물관, 야외극장과 같은 중외공원 단지에 자리잡고 있어 인근지역 주민들이 문화와 레저 생활을 하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다. 시립미술관 개관 30주년을 맞은 아주 뜻깊은 행사였다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소득은 유족들의 협조를 얻는 가운데 부친, 조부의 재능을 물려받은 자손들이 우리나라 미술계를 빛낼 재목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미술관의 전시회 개막식날 외증조부를 존경하고 따르고자 하는 증손녀 두민경 양이 유족 대표로 인삿말을 하고 있다.

 

Note

1] '남도'라 하면 전라남도 뿐만 아니라 경상남도, 충청남도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에서 '남도답사 1번지'로 해남 강진을 꼽기 훨씬 전부터 예향(藝鄕) 전라남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역사적으로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도가 유배지로 많이 쓰인 탓에 고위 관료, 학자, 문인들이 이곳에 유배온 뒤로 인근 사람들의 교화(敎化)에 힘써 시문(詩文)과 서예, 동양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2] ‘가을과 여인’(1974)은 개인 소장품으로 일반인이 평소에 접할 수 없었던 그림이다. 간만에 이번 광주 전시회에 등장한 이 그림의 모델은 천경자 화백의 큰며느리 유인숙 씨란 사실이 새삼 알려졌다. 같은 예술원 회원인 임 화백의 적극적인 천거가 천 화백 장남과의 결혼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중에는 한가족이 되어 천 화백 그림의 뮤즈가 되었다고 한다. 천 화백의 작품 '황금의 비'(1982)의 모델이 바로 며느리 유인숙 씨였다. 출처: 노형석, "천경자와 며느리 맺어준 자유분방한 색채화 명작 '가을과 여인'", 한겨레, 2022.7.13.

 

3] 운창 임직순 화백의 주요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디.

- 제2, 5, 6, 7, 8회 국전(國展: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

- 1955년 국전 문교부장관상

- 1957년 제 6회 국전 대통령상

- 1967년 한국문예상 미술본상 대통령상

- 1970년 전라남도문화상

- 1986년 대한민국 문예상 본상 대통령상

- 1993년 서울시 문화상 미술부문 본상

- 1993년 보관문화훈장 및 문예상 본상 대통령상

운창의 주요 작품 도록은 임직순 홈페이지(www.yimjiksoon.com)에서 연대별로 찾아볼 수 있다.

 

4] 2022.6.21  오후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임직순의 작품 세계와 광주 구상미술"이라는 제목으로 운창의 제자들과 전라남도 화단의 중진들이 모여 학술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 호남선 KTX를 타고 갈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내기 끝난 김제평야의 들판

 

5] KTX나 SRT를 이용하면 서울(용산/수서)에서 광주 송정역까지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송정역에서 도시고속도로를 거쳐 서광주 나들목으로 나가면 시립미술관은 바로 그 앞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서울에서도 한 나절 일정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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