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동기인 구충서 변호사가 시집을 한 권 보내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퇴직한 후 정부법무공단에서 소속 변호사들을 지휘하면서 서울대학교에서 국제법 전공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까진 알고 있었다. 나와 같이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고, 특히 언론매체를 통해 귀환 국군포로와 전시 납북자 유가족의 북한 상대 손해배상 소송, 북한 인권개선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여온 것으로 전해듣고 있었다.
얼마 전 10여년 전에 돌아가신 그의 부친 송랑(松郞) 구연식(具然軾, 1925~2009) 시인의 시집을 한 데 모아 엮었다면서 《영원을 넘어》라는 제목을 붙인 800쪽이 넘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보내 온 것이다.
두꺼운 시집(詩集)을 보는 것도 처음이려니와 고인이 펴낸 시집 한 권, 시 한 수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평론, 사진 등 기념이 될 만한 기록과 함께 엮어낸 구충서 친구의 정성이 갸륵하고도 놀라웠다.[1]
은퇴 후 본격적으로 한국 시에 관심을 갖게 된 나의 입장에서도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 동안 밝힌 바와 같이 온라인 영문 법률백과사전인 KoreanLII에 소개할 수 있는 법개념을 내포한 詩의 제목이 없을까 이리저리 훑어 보았다. 이 책은 고인의 생전 및 사후에 발간된 시집 뿐만 아니라 평론가이기도 했던 고인이 발표한 시론, 그리고 동료와 제자들이 발표한 평론까지 수록하였고 말미에는 시 제목을 색인으로 정리하여 찾아보기 쉽게 해놓았다.
부산 동아대 교수로서 주로 초현실주의(Sur-Realism) 계열의 시를 발표하였던 송랑 구연식의 시전집에서 내 의도에 맞는 시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침내 여러 날에 걸친 수색(?) 작업 끝에 "광복동·15 - mannequin"이라는 산문시와 고인이 도쿄 체류 시에 방문한 우에노 공원에서 느낀 단상을 적은 "우에노 공원" 두 편의 시를 골랐다.
우선 부산의 광복동(光復洞)은 조선 시대 초량왜관이 있던 자리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용두산 아래 부산의 중심 시가지를 형성했던 곳이다. 해방 후에 빼앗긴 우리 땅을 되찾았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조국의 광복을 제일 먼저 실감할 수 있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 광복동 거리의 어느 매장이 폐업을 하면서 아름다운 의상을 뽐내고 서 있던 마네킹이 벌거벗은 채로 내팽개쳐져 있다는 것에 시인은 비감(悲感)을 느꼈던 것 같다. 나아가 시인은 마네킹 주변에 기어다니는 거미를 보고 멀리 만리장성 너머에서 한국에 온 중국인의 위세 내지 두려움을 은연중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이 시를 발표한 1995년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던 연극 <미란다>의 연출자에게 법원이 공연음란죄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2]한 것까지 언급하였다. 밝은 조명 아래 10여분간 올누드로 연기했던 여주인공이 부끄러움에 대한 정답을 이미 말했다고 썼다. 無생명체일 망정 그녀의 옷을 다 벗겨 놓고 내다버린 가게 주인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마네킹이 사람보다 나아 보인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네킹에 관한 시임에도, 요즘 한국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젊은 여성 일색인 가상인간(virtual human)들이 장차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음을 예견한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상인간에게 어떤 윤리의식 내지 기준에 입각해서 AI 교육을 시키느냐에 따라 그 가상인간은 사회적으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상인간 붐에 관한 KoreanLII의 기사를 읽던 어느 외국인이 Poetry 섹션에 소개된 이 시를 영어로 읽는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해 보았다. 한국에서는 폐업을 한 가게 주인이 마네킹의 옷을 다 벗겨버리고 방치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르쳐주는 詩가 오래 전에 발표되었음을 안다면 그는 한국내 사정을 좀더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까?
광복동 · 15 – 송랑 구연식
- mannequin
쇼윈도 안에 세종대왕의 시퍼런 초상이 찍힌 폐기물 종이가 더미로 쌓인 벽에 비스듬히 마네킹이 머리를 기대어 넘어져 있다. 브래지어도 팬티도 벗겨져 풍요하지 못한 젖가슴, 가리지 않은 부끄러운 곳의 능선을 거미가 기어간다. 저것 어디서 본 거미다. 아, 만리장성(萬里長城) 돌담에서 본 거미다. 이곳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도 거미는 말할 줄 모른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2시간도 걸리지 않아 좁혀진 공간, 전라(全裸)가 되어 넘어져 있는 마네킹의 머리 속에 지푸라기가 가득 차 있지 않으면 공동이겠지만, 사람의 뇌를 이식하면 부끄러움을 알까. 미란다의 여주인공이 이미 정답을 하였다. 팬티를 벗긴 것은 폐업한 이 집 주인이다. 끔벅거리는 푸른 눈이 주인의 이름을 부른다. 사람보다 나은 편이다.
[월간 문예사조, 1995. 1.]
Gwangbok-dong 15 – mannequin by Ku Yeon-sik
In a show window, a mannequin stays fallen down askew with her head against a wall made of heaps of discarded fake bank notes with King Sejong's green portrait on them. Since her brassiere and panties were pulled off, she exposes her poor breast and privy parts, on which a spider is witnessed to crawl. That spider was seen somewhere. Ah, it was also found on the stone of the Great Wall. Tho' I have a question what has brought it to this place, the spider would say no word. The earth has been so reduced in size and distance that around-the-globe flight takes less than two hours. The head of the nude mannequin must be filled with a bundle of straws or kept empty. If a human brain is transplanted into it, could it happen to see her feel shameful? The heroine of Act Miranda has already given a correct answer. The guy who pulled off the panties of a mannequin is the owner of this shut-down store. Her blinking blue eyes seem to call the owner by name. I think she is better than human beings.
두 번째 시는 벚꽃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도쿄 우에노 공원을 거닐던 시인이 곳곳에서 벚꽃잎이 지는 것에서 태평양전쟁 중의 옥쇄(玉碎)를 연상하며 꽃잎 밟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공원의 홈리스 영감은 과연 일본 군국주의(militarism)의 희생자일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우에노 공원 아침의 쓰레기통을 보면 전후 일본 사회의 성 모럴이 얼마나 해이해졌는지 알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내리는 우에노 공원에는 검은 까마귀가 날고 비둘기가 날아 다닌다. 시인이 기억하는 태평양 전쟁 당시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던 군가(軍歌)가 귀에 들리는 가운데 도시가 평화의 무드에 젖어 있는 것이 까마귀와 비둘기처럼 부조화스럽기만 하다.
여기서 시인은 도쿄 한복판의 우에노 공원에서 일본내 팽배한 실존주의의 불안감과 허무함을 목격한 것 같다. 그래서 아침부터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아가씨한테서 일본내 어디로 가도 지워지지 않는 고독의 분위기기 풍긴다고 했다.
KoreanLII에는 아직 'Militarism' (군국주의) 항목이 없지만 이 기회에 시를 영역해 보기로 했다. 언젠가 북한의 선군(先軍: Military First) 정치를 해설하는 기사를 올릴 때 이 시를 소개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에노 공원(上野公園) - 구연식[3]
UENO Park in Tokyo by Ku Yeon-sik
1.
벚꽃 터널을 지나가려니
발 디딜 틈이 없이 떨어진 꽃잎의 눈보라
꽃잎을 밟지 않고 어떻게 걸어가나.
Walking through a tunnel of cherry blossoms,
I come across a blizzard of falling petals with no place to step.
How can I walk without stepping on the petals?
2.
공원에는 아침부터 술 취한 남루한 노인이
장발을 휘날리며 하늘을 우러러
전쟁에 세월을 잃은 한숨을 쉰다.
In the park, there is a poor old man, who seems to be drunken since morning,
Breathes a sigh for years lost to war
Whipping his long hair and looking up the sky.
3.
꽃나무 밑, 대형의 쓰레기통에
여행병자의 몽정(夢精)의 휴지와 정조를 경매한 코르셋과
순간을 살아가는 실존주의자가 버린 꿈과 불안이 가득하다.
Under a flowering tree, in a large trash can,
Tissues of a traveler's reverie, several corsets auctioned off last night,
Dreams and anxieties discarded by an existentialist living in the moment are filled to the top.
4.
자리를 펴고 누워, 떨어지는 꽃잎의 무덤이 되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있는 청년이
현기증나는 행복을 조소하며 구토한다.
Stretching out and lying down, he becomes a grave of falling petals.
A young man reads Kant's Critique of Pure Reason, and
vomits in derision of dizzying happiness.
5.
전쟁의 찬가, 군함마치가 울려 퍼지는
확성기의 전파에 옥쇄(玉碎)한 유령들이 광무(狂舞)하며
검은 까마귀가 날고 비둘기가 날고 꽃잎이 날고.
The hymn of war, March of the Warships, blared in the air from speakers.
The ghosts who were ready to die during the war were dancing franticly.
Black crows fly away, pidgeons fly in, and the flower petals are flying around.
6.
공원의 고독에 젖어 벤취에 앉아 있는 아가씨
어디로 가도 지워지지 않는 고독, 나와 하루를 살자
하루를 살면서 만리성(萬里城)을 쌓자.
A lady sits on a bench in the solitude of the park.
Solitude, that can't be erased anywhere, is welcome to live with me.
Let's live a day and build the Great Wall.
Note
1] 선친의 서가(書架)를 가득 메운 문예지에 여러 가지 색상의 견출지(見出紙)들이 붙어 알록달록 꽃밭을 이루고 있고 그것이 문예지에 실린 선친의 시(詩)를 선친께서 일일이 견출지로 표시해 둔 것임을 알면서도 이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엮어 내는 일을 하지 못한 채 지내왔다.
이제 문예지에 실려 있던 선친의 시(詩)를 오려내어 묶어서 시집으로 엮어 내기로 하면서 그 참에 선친께서 기왕에 출간한 시집들까지 모두 모아 함께 엮어 선친의 시를 집대성해 보고, 선친의 시에 한 시론(詩論)과 선친이 스스로 말한 '나의 시에 대한 변명'을 함께 엮어 보기로 하였다. 이는 선친의 시인생(詩人生)에 대한 총정리가 될 것이고, 작고하신 아버지께 올리는 자식의 작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중 략>
이번에 선진의 시전집(詩全集)을 편찬함에 있어서, 선친의 시집에 수록되어 있던 시들만 옮겨 편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발간되었던 시집과 수록된 시의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 표지와 간지 등을 그대로 전사(傳寫)하여 수록하기로 하였다. <중 략>
선친께서 발간한 시집의 크기는 다양했으나(특히, 시집 '검은 산호의 도시'는 4ㆍ6배판, 17x24cm 크기에 전혁림, 서성찬, 추연근, 임 호, 김천옥, 김 경, 전병덕 화백들이 표지화 또는 내지화를 그려 넣은 초호화판 시집이었다), 일정한 크기에 맞춰 축소 또는 확대하여 편집하였다. - 편자인 구충서 변호사의 '펴내는 말씀' 중에서.
2] 1994년 6월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영국작가 존 파울즈 원작 <컬렉터(The Collector)>를 각색한 연극 <미란다>를 무대에 올렸다. 이 때 여주인공 김 모씨(당시 23세)는 나체로 10여분간 하루 2차례 공연을 했다. 당시 검찰은 △주연 여배우의 전라 성애장면을 조명장치로 흐릿하게 처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10여 분간이나 공연한 점에 비추어 미학적 효과보다는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해 관객의 성적 자극을 유발시키려는 상업적 의도가 엿보이고 △여배우의 전라 장면도 원작의 전체적인 흐름과 배치되어 이 연극이 예술이라기보다는 음란물에 해당된다며 연극 연출자를 불구속 기소했다.
1995년 서울지방법원은 주연 남자배우 겸 연출자인 극단 포스트 대표 최 모씨에 대해 공연음란죄를 적용, 징역 6월에 집행유예1년을 선고했다. 연극·영화 등 공연예술물이 법의 심판대에 올라 유죄를 선고받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최종적으로 1996년 6월에 내려진 대법원 판결(대법원 1996. 6. 11. 선고 96도980 판결)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1] 형법 제245조의 공연음란죄에 규정한 음란한 행위라 함은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여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을 가리키는바, 연극공연행위의 음란성의 판단에 있어서는 당해 공연행위의 성에 관한 노골적이고 상세한 묘사·서술의 정도와 그 수법, 묘사ㆍ서술이 행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 공연행위에 표현된 사상 등과 묘사ㆍ서술과의 관련성, 연극작품의 구성이나 전개 또는 예술성ㆍ사상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의 완화의 정도, 이들의 관점으로부터 당해 공연행위를 전체로서 보았을 때 주로 관람객들의 호색적 흥미를 돋구는 것으로 인정되느냐 여부 등의 여러 점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들의 사정을 종합하여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에 비추어 그것이 공연히 성욕을 흥분 또는 자극시키고 또한 보통인의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고,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2] 연극공연행위의 음란성의 유무는 그 공연행위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고, 그 행위자의 주관적인 의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3] 시집 큐슈일기(九州日記), 1992.12.
From the Collection of Poems written daily at Kyushu, December 1992.
'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형물을 이노베이션한다면? (0) | 2022.12.15 |
---|---|
고향 산천의 골짜기와 돌 (0) | 2022.11.15 |
'색채의 마술사' 임직순 전시회 (1) | 2022.06.19 |
Busan Museum of Art and Lee Ufan (0) | 2022.05.08 |
칠십에 부르는 꽃 피는 4월의 노래 (0) | 2022.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