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

Whitman Park 2022. 2. 15. 00:12

1997년 아카데미 영화상을 휩쓴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는 북아프리카의 사막과 이태리의 전쟁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연극적인 세트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스리랑카 출신의 캐나다 작가 마이클 온다체의 동명 소설을 각색하고 연출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은 많은 사연을 간직한 등장인물들이 한적한 이태리 시골의 수도원에서 서로 애증(愛憎)의 갈등을 풀어내도록 한다.

전신화상을 입고 기억마저 상실한 '영국인 환자'(랄프 파인즈)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며 징크스에 우는 간호장교(줄리엣 비노쉬), 둘 사이에 끼어들어 긴장관계를 조성하는 사내(윌렘 데포)가 그 주인공이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이 영화는 영국인 환자가 문득문득 떠올리는 과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간호장교의 현재진행형 사랑과 겹치면서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영화의 줄거리

1944년 10월 이태리 해안의 연합군 야전병원에 전신화상을 입은 남자가 후송되어 온다. 그는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독일군 대공포화를 맞고 추락한 영국 비행기의 조종사로서 자기의 이름은 물론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영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고 자기 아내에 관하여 단편적인 기억을 이야기할 뿐이다. 차트에 "영국인 환자"라고 기재된 그를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의 간호장교 한나가 극진히 보살핀다.

야전병원이 전선(戰線)을 따라 이동을 할 때 독일군의 지뢰가 도처에 매설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의무대는 더 이상 진군을 못하고 영국인 환자를 돌보던 한나 중위는 '다 죽어가는 사람을 트럭에 실었다 내렸다 고통을 줄 수 없다'며 그를 인근 수도원으로 옮긴다.

언덕 위의 수도원은 전쟁중에 여기저기 무너지고 황량하기 그지 없다. 한나는 영국인 환자를 보살피며 가끔 모르핀 주사를 놓아주는 것이 고작이다. 그는 한나에게 헤로도투스의 역사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책갈피에는 여러 가지 그림과 쪽지, 스크랩이 끼워져 있다. 이것이 단서가 되어 영국인 환자는 기억을 하나씩 되살린다.

그는 본래 헝가리 출신의 알머시 백작으로 北아프리카에서 사막 탐사 및 지도제작 활동을 벌이는 국제 사막 클럽(International Sands Club)의 일원이었다. 유럽에서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 무렵 국제 사막 클럽에는 영국 왕립지리학회 소속의 클리프튼 부부가 새로 참여한다. 사막 캠프 파이어에서 각자 장기자랑을 할 때 클리프튼 부인이 소개한 '칸돌리스' 이야기는 미혼인 알머시의 마음을 파고 든다.
리디아의 왕은 왕비가 절세미인임을 자랑하며 그의 신하에게 왕비의 나신(裸身)을 숨어서 엿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칸돌리스 왕비는 그를 불러 "목을 내놓던가 자신을 모욕한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던가 택일하라"고 다그쳤다. 그는 왕을 죽이고 왕비를 아내로 맞아 28년 동안 리디아 왕국을 다스렸다는 이야기이다.

조용하기만 하던 수도원에 캐나다 출신 정체불명의 사내 카라바지오가 찾아 온다.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무조건 맞아들이는 한나를 알머시가 비웃는다. 그는 고향이나 국적을 불문하는 코스모폴리탄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국제 사막 클럽에서 부인을 데려오지 못한 홀애비들에게 클리프튼 부부는 질투와 선망의 적이었다. 알머시 역시 캐서린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면서도 조프리가 아내만 남겨놓고 카이로로 떠나는 것을 만류한다. 마치 운명이 그 둘을 엮어놓을지 모른다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한나가 수도원에 남겨진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영국군 폭발물 제거반의 킵 중위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녀를 제지한다. 피아노에 부비트랩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뢰밭에서 한나를 구해준 적이 있었던 印度人 킵 중위를 보는 순간 한나는 '피아노를 칠 때 남편감을 만날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연상한다. 징크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한나는 이렇게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다시 과거를 회상하는 알머시. 사막으로 탐사활동을 떠난 알머시 일행은 '수영하는 사람의 동굴'을 발견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도중에 차량전복 사고를 당해 알머시와 캐서린만 남고 다른 사람은 부상자를 싣고 카이로로 돌아간다. 캐서린이 동굴 속의 벽화를 그린 엽서(타이틀백의 그림)를 알머시에게 주자 그는 "거절할 수밖에 없다"(I feel obliged to …)고 말한다. 그는 동료의 아내를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모래 폭풍이 몰아치고, 두 사람은 자동차 안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면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이튿날 아침 알머시는 캐서린에게 그 그림을 책갈피에 다시 끼워달라고 부탁한다.

 

카이로로 돌아온 알머시는 캐서린을 "미세스 클리프튼"이라고 깍듯이 호칭하면서 자기 숙소로 돌아간다. 얼마후 캐서린은 알머시의 숙소로 찾아와 그의 따귀를 때리는데 이내 두 사람은 한 몸이 되고 만다. 누구에게도 소유당하는 것이 싫어서 독신으로 있던 알머시는 캐서린에게 지나칠 정도로 집착한다. 캐서린은 크리스마스날 "전쟁중의 배신은 평화시의 배신에 비하면 어린애같다"면서 "가슴은 불을 태우는 기관,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Heart is the organ of fire, it smashes everything)고 적는다. 두 사람의 밀애는 이내 남편 조프리가 눈치를 채게 되지만, 캐서린은 두 남자에게 각기 다른 아내(different wife) 역할을 계속한다.

카라바지오는 수도원에서 축음기와 레코드를 구해다 놓고 "이 음악 듣고 생각나는 게 없느냐?"며 알머시를 추궁한다. 알머시는 카라바지오가 자기를 죽이러 온 것을 모른다. 오히려 그를 보고 왜 항상 장갑을 끼고 있느냐고 묻는다.

1939년 3월 전쟁이 임박하자 영국 정부는 왕립 지리학회 회원들에 대해 사막 탐사작업을 중단하고 탐사지도는 영국군 사령부에 반납할 것을 명한다. 영국과 독일 사이에 전쟁이 터지고 캐서린은 알머시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한다. 이를 거부하는 알머시는 국제 사막 클럽의 해단식장에서 캐서린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떠들고 다른 남자들하고 춤을 출 수 있느냐"며 질투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어느 날 밤 알머시 방에서 나온 한나는 수도원 안에 촛불이 켜져 있음을 본다. 그 길을 따라가니 킵 중위가 그녀를 맞아 마을 성당으로 안내한다. 킵 중위는 공중곡예하듯이 한나에게 벽화를 보여주며 그녀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함께 즐거워한다. 한나는 킵 중위와 열정적인 포옹을 한다. 이튿날 아침 일찍 킵 중위는 다리 밑에 떨어진 불발탄 제거를 위해 호출된다. 한나는 사랑을 나눈 남자가 또다시 죽게 될까봐 불안해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그의 뒤를 쫓는다. 미국 기갑부대가 진격해 올 때 킵 중위는 가까스로 폭발물 제거작업을 마치고 그때 마침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카라바지오는 알머시의 기억이 거의 회복되었다고 믿고 그의 진실된 자백을 요구한다. 그는 사막횡단 지도를 독일군에게 제공한 스파이였으며 그로 인해 수천 명의 연합군 장병이 희생되었다고 따진다. 그러나 알머시한테는 애절한 사연이 있었다.
"캐서린이 죽은 것은 나 때문이었소. 내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내 이름이 너무 길어서 영국군이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오"라며 울먹인다. 그때문에 자기 이름조차 잊고 싶어 한 알머시를 카라바지오는 "죽일 수 없다"고 말한다.

킵 중위도 다음 임무를 받아 수도원을 떠나고 알머시는 징크스에서 해방이 된 한나에게 남은 모든 모르핀을 한꺼번에 주사해 달라고 간청한다. 한나는 그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잠이 들 때까지 그의 옆에 누워 헤로도투스 책을 읽어준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일견 스펙타클한 멜로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적한 수도원에 사냥감을 쫓는 눈빛을 한 카라바지오가 등장하면서 부지불식간에 미스테리 소설로 반전된다. 카라바지오는 정의(正義)의 심판관으로서 알머시를 처단하러 온 것이다. 알머시는 과연 무슨 죽을 죄를 지은 것인가.

카라바지오는 수도원의 법정에서 과거를 잊어버린 알머시를 상대로 인정신문을 벌인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밝힌 알머시의 죄상은 전시에 북아프리카 사막 지도를 빼돌려 독일군에 팔아넘기고 이 과정에서 동료 부부를 살해하고 다른 동료는 자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수천 명의 연합군 장병이 목숨을 잃었고 무엇보다도 카라바지오 자신은 독일군에게 손가락을 절단당했다며 책임을 추궁한다.

카라바지오는 또 클리프튼 부부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는다. 그러나 알머시는 자기가 직접 죽인 건 아니지만 그녀를 죽게 만든 것은 자기 책임이라며 울먹인다. 조프리가 자살적인 착륙을 시도하다 그는 즉사하고 캐서린은 중상을 입어 그녀를 동굴 안에 뉘어 놓고 영국군에 구조를 요청하러 갔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독일군 스파이로 몰려 호송되어가는 도중 가까스로 탈출하여 캐서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독일군에게 지도를 넘겨줬을 따름이라고 설명한다.
1942년 6월 토부룩을 기습공격한 독일군의 신문을 받을 때 자기 신분을 감추기 위해 약혼녀의 울부짖는 소리도 외면했던 카라바지오로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사랑의 이야기는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준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서로 '아내'라고 부르는 관계는 결코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률은 배우자의 不貞을 혼인관계가 지속될 수 없는 이혼사유로 규정(민법 840조 1호)하고 있지만, 아내의 불륜의 현장을 지켜 본 사내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살인을 저지를 만한 증오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조프리는 알머시를 데릴러 간다고 하면서 아내를 앞에 태우고 아내와 정부를 함께 죽이려고 급강하 저공비행을 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국적(國籍)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영국 독일 헝가리 이집트 사람이 함께 모여 제작한 지도가 이를 먼저 손에 넣은 영국의 소유물이 되고 이를 빼돌리는 것은 간첩행위가 되는 것이다. 다국적기업의 세계적인 경영활동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교류가 국경의 소멸(borderless)을 촉진하고 있는 오늘날 강한 나라가 지도 위에 그어놓은 선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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