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V에서 워너 브라더스의 1995년작 <함정(Just Cause)>이 방영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비디오 테이프가 출시된 만큼 영화 개봉후 비디오부터 나오고, 케이블에서 방영된 다음 공중파 방송을 타는 순서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숀 코네리, 에드 해리스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음에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영화 후반부의 극적인 반전과 액션 장면은 <양들의 침묵>과 <케이프 피어>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종영된 TV 인기 드라마가 장르는 다르지만 일본의 만화를 표절한 것이라는 시비가 일었는데, 이 영화는 하도 여러 편의 영화 스토리를 차용하였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독창성마저도 느껴진다. 제작자와 감독(안 글림처 감독은 공동제작자 3인중의 한 사람이다), 시나리오 작가 등이 모여 마치 신상품을 개발하듯이 기존 영화의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장면을 재구성하고 다시 미국 사회의 영원한 이슈인 흑백문제, 사형제 폐지론으로 포장을 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인기곡 메들리를 영화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풍자적 모방임을 밝힌 <롱풀리 어큐즈드>와 같은 패러디 영화와는 달리 스토리의 전개가 매우 진지하다.
영화의 줄거리
이 영화의 시작은 '아버지의 이름으로'와 비슷하다. 플로리다주 에버글레이드(습지가 많아 관광객들은 엘리게이터 악어에 조심해야 한다)에 있는 처가를 방문한 하버드 법대 폴 암스트롱(숀 코네리 분) 교수는 명문대학 출신의 젊은 흑인 사형수 보비 얼 퍼거슨(블레어 언더우드 분)으로부터 무죄 탄원을 받고 재심청구 사건의 소송대리인을 맡는다. 보비는 10세 백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흑인 수사관 태니 브라운(로렌스 피시번 분)으로부터 구타와 권총 위협 등의 고문을 당하여 허위자백을 하였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사형 폐지론자인 암스트롱 교수의 탁월한 변론과 보비의 감방 친구인 사형수 블레어 설리번(에드 해리스 분)의 진범 자백으로 보비는 석방이 된다. 성경 구절을 줄줄이 암송하는 설리번은 연쇄살인범이기에 그가 백인 소녀를 한 명 더 강간 살해하였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더군다나 그의 자백으로 결정적인 증거까지 발견된 터이다. 살인마가 고도의 두뇌 플레이로 변호사와 수사관을 조롱하는 것은 <양들의 침묵>의 앤소니 홉킨스와 너무 흡사하다. 또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여론의 조성은 <데드 맨 워킹>의 복사판이다.
자기가 변호를 맡은 사형수가 석방되었음에도 암스트롱은 뭔가 석연치 않다. 이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였던 브라운 형사가 그의 딸이 피해자 소녀의 절친한 친구인 탓에 인종적 편견이 아닌 인간적인 정리로 보비를 진범으로 몰았던 것으로 여기지만, 브라운의 확신은 노련한 수사관으로서의 육감 내지 신념에 가깝다. 더욱이 블레어의 자백은 모호한 구석이 많고 사건 정황의 묘사나 증거물의 소재지 진술은 몇 년을 옆 감방에서 함께 지낸 처지라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일이다. 리처드 기어 주연의 '솜머스비'와 유사한 설정이다.
암스트롱이 그의 의혹을 해결하기도 전에 블레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자유의 몸이 된 보비는 그 가족의 주변을 배회한다. 지방검사 출신인 암스트롱 부인이 딸과 함께 호텔에서 체크아웃할 때 보비는 모녀를 위협하여 에버글레이드의 습지대로 향한다. 도심 대로상의 자동차 추격신, 개폐교 위의 자동차 곡예는 이 영화의 반전을 암시하는 것으로 마틴 스코어세지 감독이 리메이크한 <케이프 피어>를 예고한다. 보비는 과거 암스트롱 부인의 검사 시절에 사형을 언도받아 결국 성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며 <케이프 피어>에서의 로버트 드 니로와 같이 원한 맺힌 복수를 결행하는 것이다.
암스트롱은 브라운 형사의 도움을 받아 모녀가 인질로 잡혀 있는 습지대의 오두막(악어 사냥꾼의 대피소)으로 간다. 보비는 브라운 형사부터 처단하고 처자를 구하러 뛰어 들어온 암스트롱과 수중 혈투를 벌인다. 이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브라운 형사가 암스트롱을 구하고 범인은 악어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호주의 코미디언 폴 호건이 주연한 <크로커다일 던디>와 <케이프 피어>를 합성한 장면들이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는 진보적 성향의 암스트롱 교수를 내세워 사형(death penalty, capital punishment) 폐지론을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드라마의 진행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관객이 그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서게 된다. 인텔리 사형수가 자기를 감옥에 처넣은 전직 검사의 남편을 변호인으로 끌어들여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그 가족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소행이기 때문이다. "범인은 왜 나를 골랐나(Why me?)"하는 암스트롱의 절규는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을 상대로 다시 강도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보비는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악의 구분이 명확할 때에는 사형 폐지론자들의 주된 논거(<데드맨 워킹> 참조), 통계적으로 상소심에서 사형수의 1/3에 대한 판결이 번복되었다는 '인간의 오판과 자의, 편견에 의한 또 다른 형태의 살인'이라는 주장이 빛을 잃는다. 오히려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범죄자는 영원히 인간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미국에서 사형이 집행되고 있는 지역이 대부분 과거 노예제도를 시행했던 남부의 여러 주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백인 소녀를 강간 살해한 흑인은 무조건 사형'이라는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유추(類推, analogy)를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 '정당한 사유(just cause)'는 미국법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개념으로 예컨대 행정기관이 면허를 취소하거나, 공무원에 대하여 파면 기타 불이익 처분을 할 때의 근거가 된다. 이 경우 결정권자에게 합리적인 이유가 있으면 그의 재량(discretion)으로 처분을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과연 "복수의 정당한 사유, 고문 수사의 정당한 사유, 인권보호와 무죄 석방의 정당한 사유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시사하고 있다. 또 비슷한 맥락에서 '정당한 사유 작전(Operation Just Cause)'이란 민간단체가 있는데, 이는 월남전 때의 전쟁포로·실종자(POW/MIA)의 구호에 앞장서고 있는 기관으로서 미국 사회는 그들을 가족 품으로 돌아오게 하여야 할 정당한 사유가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끝으로 이 영화의 보비와 같은 진범이 수사단계에 고문을 받은 사실을 주장하고 가짜 범인을 가공 날조한 후 재심을 청구하여 석방될 수 있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2호 "원판결의 증거된 증언, 감정, 통역 또는 번역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허위인 것이 증명된 때", 제7호 "원판결, 전심판결 또는 그 판결의 기초된 조사에 관여한 법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공소의 기초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의 규정 및 제422조 "······ 확정판결로써 범죄가 증명됨을 재심청구의 이유로 할 경우 그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는 그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의 청구를 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살인죄의 진범이 따로 있음이 밝혀질 경우 사형수라도 재심으로 무죄 석방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설령 사형집행이 끝났다 하더라도 그의 유가족이 재심 청구를 할 수 있다(형사소송법 427, 424조).
그러나 어차피 사형 당할 사람이 동료 사형수의 죄목까지 자백할 경우 그에 휘말리지 않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여전히 소송참여자인 검사와 피고측 변호인, 법관(미국의 경우 배심원 포함)의 몫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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