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인과 농부, 기자

Whitman Park 2024. 7. 24. 10:00

신문을 장기 구독하다보면 자연히 좋아하는, 믿고 읽는 기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한국경제신문은 내 저서의 서평을 크게 실어준 인연으로 정년 퇴직할 때까지 오랜 기간 구독자였다.

그때 문화부 기자였던, 나중엔 천자칼럼을 쓰던 고두현 기자가 생각난다.

그가 시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의 신춘문예 당선작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시인 역시 남해의 섬 사람으로서 남해의 유배지(노도)에서 숨을 거둔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1692)을 기리는 시였다.

전례에 따라 "남해 가는 길"을 영어로 옮기는 동안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1993). 서포가 노량 앞바다에서 느꼈던 비애를 읊었다.

 

지금처럼 연륙교가 없을 때였으니 당연히 물살이 거센 노량 해협을 나룻배로 건너가야 했다.

그의 유배지는 남해도에서도 한참을 들어가 백련 포구에서 다시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 노도였다. 그 당시 노(櫓)를 많이 만들었던 섬이라 해서 노도 (櫓島) 또는 삿갓섬으로 불렸다고 한다.

직전 적소(謫所)였던 선천은 평안북도에 있어서 겨울엔 몹시 추웠다. 윤삼월 수레 안에 갇혀서 반도를 종단하여 천리 길을 내려올 때에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남해의 육지 쪽 나룻터에는 석양이 비치는데 바다 건너 남해도의 망운산(望雲山 786m) 기슭에는 눈발이라도 날리는지 차갑게 느껴졌다. 남해도 끝자락은 차라리 이곳보다는 따뜻할 것으로 기대가 되었다.

가시 울타리 속에 유리안치된 유배지에선 무엇을 할꼬.

땅에서 나는 모든 살아숨쉬는 것을 모아 화전(花田: 왜냐하면 귀양 간 사람이 火田을 일구고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이나 가꾸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150년 후 추사 선생은 제주도에서 수선화를 가꾸고 지냈다. 실제로 서포 선생은 섬사람들에게 ‘노자묵고 할배’라고 불렸다고 한다. 낮엔 일도 하지 않고 초옥에서 글만 읽고 쓰는 모습이 ‘놀고먹는’ 것처럼 보였을 법도 하다.

그는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결기를 보였다. 그 당시 집필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숙종이 장희빈을 총애한 나머지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내쫓은 일을 애둘러 비판한 한글 소설이었다. 실제로 이 책을 받아본 숙종은 이 사실을 깨닫고 화를 내며 책을 내던졌다고 한다.

 

 

The Road to the South Sea

-- Exile Poems  by Ko Doo-hyun

 

The turbulent Noryang Strait is catching up with me.

It's been a few days since I returned from Seoncheon.

I was on a wet and muddy road in leap-year March,

A thousand li by cart, a fifteen li by boat,

The quay is still out of reach.

The sunset is dazzling in the setting sun.

Only the snow is cold at the foot of Mangun Mountain.

Once I go to that flower-like island

flowing a leaf across the sea,

It'll be warm, returning with soil or bones.

When all the breathing things from the earth are collected.

A flower bed will be made, and at night

I'll compile a storybook Nine Cloud Dream for my mother.

Dreaming of the South Sea

Buried in the Angang River, prostrate like a Satgat hat,

I will never return alive again.

 

김만중은 숙종조에 치열했던 서인과 노론 당파 싸움의 제물이 되어 선천과 남해로 유배되었으며 그 사이 그의 모친은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그는 모친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 그가 죽은지 6년이 지나서야 관직이 복구될 수 있었다.

 

고두현 시인은 기자로서도 맹활약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가 잘 아는 주페의 서곡 "시인과 농부"에서 관현악 서주 부분이 끝나면 첼로로 연주하는 솔로 파트가 나온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글에서는 경제지로서는 드물게 농작물을 다루는 농부 같이 살아 숨쉬는 것(生命體)을 소중히 여기는 시인의 감성이 묻어났다.

 

경제지에서 기자로 활동한 고두현 시인은 2018년 남해의 이웃 동네인 사천에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 대대적인 검찰 수사가 몰아닥쳐 여러 사람이 곤욕을 치른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대부분 당국에서 "방위산업체=비리의 온상"이라고 의심했던 대형 비리는 없는 것으로 밝혀진 사실에 안도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우주발사체와 고등훈련기 T-50 개발의 싹이 꺾일 뻔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서포 김만중과 같이 억울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고두현 논설위원은 사설이 아닌 천자 칼럼에 취재의 뒷이야기를 썼다.

 

* 남해도 앞바다의 노도. 출처: Naver 제주바다 숨비소리

 

잘못된 수사(搜査) - 고두현 논설위원

 

국내 4대 방위산업체 중 한 곳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검찰 수사에 시달린다. 작년에도 대규모 비자금 조성 의혹 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몇몇 개인 비리 외에는 별다른 혐의가 없다는 게 밝혀졌다. 지난 4년간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8대 방위산업 비리’ 사건의 무죄율이 50%나 된다. 방산비리(防産非理) 혐의로 구속기소된 34명 중 17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방위산업은 날개 없이 추락했다. 방산 수출을 견인해 온 KAI의 지난해 수출은 전년 대비 83% 급감했다. 매출이 크게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2089억원의 영업손실까지 입었다. 세계 100대 방산기업 순위에서는 1년 전 50위에서 98위로 48계단 떨어졌다. 고등훈련기 T-50 수주 차질 등 후유증까지 겪고 있다.

부실기업 인수 등 배임 혐의로 기소된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과 이석채 전 KT 회장, 민영진 전 KT&G 사장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석채 전 KT 회장은 “4년간 34차례 재판에 출석하며 수억원의 변호사 비용을 쓰는 등 개인적인 고통도 컸지만 수사 여파로 물거품된 KT의 도전 사업들이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

 

검찰이 이 잡듯이 뒤진 사건들이 잇달아 무죄로 판명나면서 표적수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검찰 출신 임수빈 변호사의 논문에 따르면 표적수사는 검찰권 남용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표적수사란 기소할 사건보다 대상자를 먼저 선정한 뒤 집중적으로 수사하는 것을 말한다. 검사가 스스로 표적을 정한 ‘독자적 표적수사’와 상부기관 명령에 따른 ‘하명수사’, 개인의 부탁을 받은 ‘청탁수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검찰의 표적수사는 짜맞추기식의 억지수사 등 무리수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검사가 원하는 증거를 찾지 못하면 사건과 무관한 ‘별건수사’로 압박하거나 회유·협박을 동원하기도 한다. 기업 경영자들에게는 적용 범위조차 모호한 배임죄를 갖다붙여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 투자’까지 불법으로 몰아간다. 지난해 검사의 과오로 인해 무죄판결이 난 사건이 1115건에 이른다. 억울하게 구금됐다 풀려난 사람에게 지급하는 형사보상금도 360억원을 넘었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해 취임하자마자 “과거 수사에서 인권 보장 등이 미진했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수사심의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도 했다. 올 7월에는 대검찰청에 인권부를 신설했다. 그러나 무리한 수사 관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수사를 받던 피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계속되는데도 검찰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상세히 점검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권력 갑질’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출처: 한국경제신문 [천자 칼럼], 201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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