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과 열대야로 시달렸기에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소슬바람이 반갑기 그지없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8월의 마지막은 반갑기보다 아쉬움과 쓸쓸함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야니(Yanni)의 명곡 "The End of August" 때문이다.
1994년 미국 유학생활을 거의 마칠 때쯤 그 연주 실황을 미국의 공영방송 PBS 채널에서 아주 인상깊게 보았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의 야간 공연,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열띤 청중의 반응, 감미로운 바이올린 연주가 영화배우 같은 야니의 제스처와 함께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만학(晩學)에 힘들었던 로스쿨 공부가 끝나간다는 아쉬움과 함께 또 언제 이렇게 자유로운 학창생활을 해볼 것인가 하는 상념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스가 낳은 세계적인 뉴에이지 뮤지션 야니 (본명은 Yiannis Chryssomallis, 1954- )는 1993년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아래의 아크로폴리스 극장에서 수많은 청중이 모인 가운데 그의 히트곡들로 채워진 공연을 가졌다.
시작은 고대 극장의 무대에서 웅장한 관현악 사운드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Santorini"가 연주되어 청중의 기대감이 한껏 고조되었다. 산토리니는 수천 년 전의 화산 폭발로 칼데라 지형의 산봉우리만 섬으로 남은 그리스의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아니던가!
그 실황은 미국 PBS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영이 되었다. 이날 마지막 순서로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카렌 브릭스가 집중 조명을 받으며 야니의 반주로 The End of August의 주선율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하였다.
야니는 그 후에도 인도의 타지 마할, 중국의 자금성에서도 야외 공연을 가졌지만 아크로폴리스 라이브 공연은 세계 최고의 공연으로 알려졌으며 실황 음반 역시 역대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
팔월의 마지막 날 - 마침 우리나라에도 8월 말의 서정을 노래한 시가 있다.
시인은 계절이 바뀌면 더위도 가시고 곧 추위가 닥칠 터이니 빠르게 지나는 세월을 아쉬워하지 말고 때를 즐기며 하루 하루를 잘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말한다.
늦팔월의 아침 - 김영남
덥다고 너무 덥다고
저리 가라고 밀어 보내지 않아도
머물고 떠날 때를 알고 있는 여름은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잠간 머물다 금새 떠날 것을 알면서도
호들갑을 떨며 아우성을 치던 우리는
언제 그랬냐고 정색을 하며 가을을 반기겠지.
짧디짧을 가을 정취를 느끼기도 전에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마치 가을이 영원히 있어줄 것처럼 칭찬하다가
언제 떠났는지도 모르고
어느샌가 입김 호호 불면서
또다시 추위를 나무라며
문지방 너머 목 길게 빼고
봄이 오기를 마냥 기다릴 거다.
그러면서 나이만 먹는다고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투덜거려도 보고
용기 없어 하지 못했던 것에
미련도 되씹어 보며
커다란 나이테 하나를
또 끙끙 둘러메고 앉아
문밖 건너 진달래 붉은 향기
가슴에 밀려들면
혹 서러워 눈물 흘릴지도 모르겠다.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나 말고
어여 오라고 손짓이나 말지.
그냥 혼자 조용히 흐르는 세월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만큼
가만히 놓아두고 때를 즐기며
덥던 춥던 깃털처럼 가볍게
하루 또 하루를 즐겨 살아주면
그것이 행복이고 참살이가 아니련가?
망개 열매를 따먹고 살아도
이승이 낫다는데
지금 살아 숨쉬고 머무는 여기 산천이
천국이고 낙원이 아니면
그 어드메가 무릉이고 도원인가?
창 너머 수세미 꽃에 벌이 드나드는
늦팔월의 아침이다.
위의 시는 1년 전에 다음과 같이 영어로 옮긴 바 있다.
→ A Late August Morning by Kim Young-nam
한편으로는 '여름'하면 떠오르는 음악은 비발티의 4계 중 여름 2악장과 히사이시 조가 OST를 맡은 <기쿠지로의 여름> 테마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의 시에서 말한 대로 여름이 지나가면 짧디짧은 가을의 정취를 느낄 겨를도 없이 추운 겨울이 닥칠 것이다.
그래서인지 YouTube에서 야니의 "The End of August"를 찾아볼 때면 처음부터 끝까지 Armenia 지방의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 사진을 보여주는 이 동영상(위의 사진)을 더 좋아한다.
이 곡의 멜로디를 따라가노라면 내가 젊었던 리즈 시절의 어느 한 장면으로 첨벙 뛰어들어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여름이 떠나니
이젠 결실의 계절
As the scorching
Summer is gone,
Get ready for the time of harvest!
그럼 이성복(1952~)의 시 "그 여름의 끝"을 읽어본다.
Yanni의 애조 띤 곡과 제목은 같아도 앞서 소개한 김영남의 시 결구(結句)처럼 지금 사는 곳을 천국으로 믿고 참고 견뎌낸 나무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바로 여름의 폭풍우를 견뎌 내고 피어난 나무 백일홍 즉 배롱나무 꽃에 대한 승리의 찬가이다.
여름의 폭염과 폭풍우 속에서도 붉은 꽃을 피운 배롱나무 말이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The End of the Summer by Lee Seong-bok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That summer, the crape myrtle survived.
It didn't fall down in one storm or the next.
It hung on to its red blossoms like a hailstorm.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That summer, it was in the middle of the storm.
That summer, its despair hung red flowers like a joke.
It didn't fall down in the storms that followed.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Though it fell, that crape myrtle hung and burnt and spewed fire.
When the stout flowers covered the narrow yard with blood,
Its despair was over like a j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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