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동기회에서 2월의 오프라인 행사로 국립중앙박물관 관람을 기획하였다.
70대의 동기들 중에는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평일 낮시간의 참가 희망자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나 역시 용산에 있는 중앙박물관 전시작품을 여러 매체를 통해서 보았기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좋은 기회다 싶어 동기들과 함께 관람하기로 했다. 마침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특별전시회도 볼 수 있어서 기대가 컸다.
아닌게 아니라 3월 3일 특별전시 마감이 임박한 탓에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안내원이 현장 발권은 시간대별로 중도에 마감이 될 수 있다 하여 우리 앞의 긴 줄을 보고 약간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 사이에 상감청자, 이조백자 등 상설전시를 보다가 오후 늦게라도 보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 예약보다 현장발권이 많아서인지 1시간 줄 서서 기다린 끝에 오후 1시에 입장하는 표를 경로할인(8000원)으로 살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상설전시관 내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가면 딱이었다.
덕분에 국빈 환영만찬이 열렸던 중앙홀을 지나 경천사지 석탑까지 미리 구경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직접 가 보았던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과 비교해도 규모 면에서 뒤지지 않았지만 전시품은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전 것까지 있음에도 외관이 너무 현대적이어서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에곤 실레였다.
사진만 보아도 그의 표정는 불만에 차있고 반항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헐리웃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 나오는 주인공 제임스 딘을 연상케 한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의 아버지는 철도역장이었다. 장남인 실레가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은 알았으나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실레는 아버지의 사후에 철도회사의 직원인 외삼촌이 후견인이 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 그는 말수가 적고 체육과 그림에 관심을 보였다.
실레는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분위기의 학교 수업에 반발하여 몇몇 학우들과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하고 3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실레가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 많은 교류를 한 것이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클림트는 대번에 실레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위한 멘토 역할을 아끼지 않았다. 클림트는 젊은 실레의 그림을 사주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는가 하면 모델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또 실레를 분리주의와 연결된 미술 공예 전문 비엔나 워크샵에 소개하고, 후원을 해줄 만한 독지가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실레는 클림트의 추천으로 1909년 비엔나 예술전시회에 작품 몇 점을 출품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실레는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화풍에서 벗어나자 인간의 본연의 모습 뿐만 아니라 성(性 sexuality)에 대해서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21세이던 1911년 17세인 발부르가 노이질(애칭은 Wally)과 비엔나에서 동거를 하며 종종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실레는 왈리를 데리고 임대료가 싼 어머니의 고향인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크루마우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워낙 보수적인 소도시였기에 실레가 어린 소녀를 모델로 세운다는 소문이 나돌자 비엔나 서쪽에 있는 노이렝바흐에 화실을 마련하고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실레는 그곳에 가서도 십대 소녀들을 유혹하여 외설적인 그림을 그리고 어린이들이 드나드는 곳에 음란한 그림을 전시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결국 유죄가 인정되어 한 달 가까이 구금되어 있기도 했다.
1914년 실레는 다시 비엔나의 교외로 이사하여 화실을 차렸다. 이웃에 사는 개신교도의 딸 에디트와 사랑을 하게 되어 왈리는 그를 떠나고 말았다. 1915년 그는 신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디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실레도 징집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입대를 하자 에디트도 그를 따라가 프라하 병영 가까운 곳에 기거하였다.
실레는 군 복무 중에도 틈 나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상관의 배려로 베를린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나중에는 러시아 포로수용소에서 행정병으로 일하면서 수용소 식당 관리를 맡아 그들 부부는 배급보다 나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제대 후 실레는 비엔나로 돌아와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벌였다. 1918년에는 비엔나에서 열린 분리주의 전시회에 초대되어 50여 점의 작품을 중앙홀에 전시하는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임신 중이던 부인 에디트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숨을 거두자 실레 역시 감염이 되어 사흘 후에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동안 실레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고 에로틱하며 불안에 가득차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주면서 자신의 자화상도 여러 점 남겼다.
그의 사후 왈리의 초상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비엔나의 부호인 루돌프 레오폴트가 수집하였다. 후에 오스트리아 정부가 레오폴트의 컬렉션을 매입하여 200점 이상의 실레 작품도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별도로 전시되고 있다. 1997-1998년 그의 작품이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성황리에 전시되었는데 작품 몇 점이 나치 약탈품인 것으로 알려져 뉴욕 지방검사가 이를 압류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비엔나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벨베데레 궁에 전시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러 작품을 관람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에곤 실레를 좋아한다는 다른 회의 참석자를 따라 레오폴트 미술관에 가서도 실레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이 대부분 레이폴트 미술관 소장품들이니 나로서는 구면인 셈이었다.
그때는 나 역시 일반적인 감상평을 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시대의 주류(main stream)에서 벗어나 그가 얼마나 불안해 하면서도 고집스럽게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는지 이해가 갔다.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비엔나 1900년’을 만나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회는 아래의 YouTube 채널에서도 전문 학예사의 해설과 함께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Jtb91PVR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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