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사 윌리엄(A Knight's Tale, 2001)

Whitman Park 2022. 2. 17. 08:25

우리 국민은 박찬호, 박세리 덕분에 모두 열렬한 프로 스포츠팬이 되었다. 우리가 IMF 위기에 처하여 낙담하고 있을 때 박세리가 워터 해저드에 빠진 공을 걷어올리면서 LPGA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보고 우리 모두 조만간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오늘날 시즌별로 열리는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골프는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스타 선수는 많은 팬(이른바 '오빠 부대')들을 몰고 다닌다. 프로 선수들은 우승을 거듭할수록 인기와 부를 거머쥘 수 있다고 믿기에 오늘도 많은 예비 선수들이 땀흘리며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으로 출장을 가는 비행기 속에서 본 <기사 윌리엄>(A Knight's Tale, 감독 브라이언 헬겔런드)은 중세를 무대로 한 영화라기보다 오늘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프로 스포츠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바로 런던 교외의 윔블던에서는 얼마 전에 영화 속의 마상 창술(jousting) 경기와 너무나도 흡사한 테니스 대회가 끝났던 것이다. 영화의 첫 머리에서 관중들이 박자를 맞춰가며 그룹 '퀸'의 "We will rock you"를 열창하는 것을 보고 이 영화가 단순한 시대극이 아님을 짐작한 탓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줄거리

윌리엄(히스 레저)은 평민의 아들이지만 마상 창술 대회에 나가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를 어느 시골의 기사에 맡겨 시중을 들게 한 뒤로 윌리엄은 기사를 따라 각지를 돌아다닌다. 어느 마상 창술 대회 시합 도중 주인 기사가 심장마비로 죽자 그는 자신이 기사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대회에 출전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시합을 관전하였던 덕분에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얼굴이 투구에 가려 신분이 노출될 염려는 없었지만, 마상 창술 대회는 귀족만이 참가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는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다.

윌리엄은 다음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종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나는데 도중에 시인임을 자칭하는 쵸서를 만난다. 도박을 하다가 입고 있던 옷마저 털린 쵸서는 윌리엄의 정체를 알아보고, 그에게 '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이라고 하는 가짜 기사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주는 대가로 그의 일행에 합류한다. 가짜 기사 윌리엄의 일행은 그의 일정을 챙겨주는 사람, 연습 상대가 되어주는 사람에 이어 마구와 창을 손질하는 사람에 홍보맨 격인 쵸서까지 동참하게 된 것이다.

마상 창술대회의 챔피언에 인생을 걸었던 윌리엄 - 가짜 기사는 참가하는 대회마다 우승을 거둔다. 윌리엄은 어느 마상 창술대회에 관중으로 참석한 아름다운 죠슬린(셰닌 소사몬)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다. 그녀는 귀족이고 그와는 신분차이가 있지만 일단 가짜 기사 노릇을 하고 있기에 쵸서의 연서 대필에 힘입어 그녀의 환심을 산다. 죠슬린 역시 그의 순진하면서도 남자다운 기개에 이끌린다. 윌리엄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시합에 우승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패자(敗者)가 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 가서 전투(백년 전쟁)를 수행하고 있던 진짜 청년 귀족 애드헤마(루퍼스 슈얼) 백작이 마상 창술 대회에 등장하면서 죠슬린과 윌리엄과의 사이에 삼각관계가 벌어진다. 애드해머는 어설픈 행색의 윌리엄의 출신성분을 의심하고, 아니나 다를까 런던에서 마상 창술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아간 윌리엄이 평민의 아들임을 폭로하기에 이른다.

귀족 출신이 아니기에 윌리엄은 결국 참가자격을 박탈당하고 투옥된다. 그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려는 순간이다. 죠슬린은 그의 처지를 이해한다면서 멀리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그때 전에 마상 창술 시합에서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적이 있는 흑기사 에드워드가 나타나 왕자의 권한으로 윌리엄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 윌리엄은 당당히 진짜 기사로서 출전하여 결승전에서 애드헤마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다.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에 등장하는 쵸서가 본격적인 영시(英詩)를 선보인 제프리 쵸서(Geoffrey Chaucer)인지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시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지는 그가 한낱 도박이나 일삼는 시정잡배로 그려져 있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의 대작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기사 이야기'에서 이 영화의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지만, 시골 청년의 성공담이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 경기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영시는 어렵게 생각되지만, 다음 몇 구절에서 보듯이 6백년이 넘는 시대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늘날의 정경이나 거의 진배없다.

 

3월의 가뭄을 헤치고 꽃을 피우는 습기로
온 세상 나뭇가지의 힘을 북돋우는 계절의 어느 날
싸자크의 타바트 여관에는 스물 아홉 사람이 몰려들었다.
우연히 모여든 형형색색의 사람들은 모두 캔터베리를 찾아가는 순례자들이었다.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동행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 캔터베리를 향하여 출발할 것을 약속했다.

< 중 략 >

그 중에 혈색이 좋아 보이는 탁발승(托鉢僧)이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이 스님은 소속 교단의 큰 기둥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는데
자기 구역의 지주며 유지들, 마을의 유한 부인들하고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본당 신부보다 더 큰 고해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고해를 들어주는 모습은 인자하기 이를 데 없고,
걸걸한 목소리로 죄장의 소멸을 선언하는 태도는 천진난만했다.
죄를 보속(補贖) 받으려면 상당한 금품을 내놓고 깊은 참회의 정을 표시해야 했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억지 회개를 하는 대신
가난한 탁발승에 동전 몇 푼 던져주고는 죄를 벗은 듯 만족해했다.
그는 다니는 마을마다 모르는 술집이 없었고,
주막집 주인과 접대부를 병든 환자나 거지들보다 더 가까이 했다.
왜냐하면 병자나 거지를 가까이 하는 것은 별 이득이 없고
돈 많은 유지나 요식업자를 잘 사귀어 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 맞게 내용 일부를 수정하였음)

 

2001년도 정기국회의 국정감사 등 국회 일정이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로 도배되어 버렸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야당은 현 정권의 도덕성 위기로 질타하고, 여당은 이를 일개 금융사기꾼의 마당발 행각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논하는 21세기 벽두의 우리 국정(國政)은 부끄럽게도 14세기말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에피소드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바깥 세상에서는 중국 경제의 급성장, 인도의 IT 대국 부상, '문명의 충돌'로 비화될 수 있는 테러 대전의 발발로 소란스러운데, 우리 정치의 수준은 "누가 누구의 돈을 얼마 받아 챙겼다"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은 수도(修道)와 전도, 교화(敎化) 사업은 게을리 한 채 파계와 엽색 행각을 일삼고 속죄금이나 받아 챙기는 탁발승을 풍자한 [캔터베리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차라리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각자 역할을 분담하고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훨씬 건전해 보인다. 요즘은 스포츠·엔터테인먼트 사업도 유력한 벤처 기업이 될 수 있다. 재능이 있어 보이는 젊은이를 골라 그가 대성할 수 있도록 돈을 써가며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고 그가 성공하였을 때 수입을 나눠갖는 것이다. 그가 대중의 인기를 누리게 되면 주식회사를 차려놓고 기업을 공개(IPO)하여 주가 상승에 따른 추가 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윌리엄의 야심과 실력을 알기에 같은 기사를 따라다니던 시종들이 로드매니저를 자청하고 윌리엄을 가짜 기사로 내세워 마상 창술 시합을 계속하게 한다. 그리고 쵸서 같은 재능 있는 젊은이를 홍보맨으로 스카웃하고, 대장장이 여인은 자재담당으로 영입하여 매우 성공적인 벤처 기업을 차렸던 것이다. 그들은 이 영화에서처럼 강력한 경쟁상대를 만나거나 제도의 벽에 부딪혀 많은 경우에 실패와 좌절을 겪게 마련이지만, 어차피 맨주먹으로 시작한 터라 빈손을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서면 된다. 간혹 유력한 후원자를 만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다. 그래서 이 영화을 보노라면 누구나 이러한 시스템은 계속되어야 함을 마음속으로 공감하게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상 창술 대회장에 모였던 관중들이 퀸의 히트곡 "We are the Champion"*을 열창을 열창하는 것처럼.

* '챔피언'에는 우승자, 선수권자라는 뜻 외에 지지자, 옹호자라는 의미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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