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코로나 거리두기로 영화관에 가긴 어렵지만 그래도 볼만한 화제작을 한두 편 추천해주세요.
P: 요즘 열성 게이머들은 대형화면과 음향효과를 즐기러 영화관에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화관에 가는 이유가 있잖습니까? 동반자와 상의하여 예매를 하고 시간에 맞춰 먹고 마실 것을 챙겨 입장할 때의 짜릿함과 설레임. 그리고 화면 가득 펼쳐지는 박진감 넘치는 영상과 그에 몰입하게 만드는 음향효과 -- 이런 것들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지요. 코로나 때문에 이걸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상미와 감동적인 스토리가 큰 여운을 남기는 최신작 몇 편이 화제가 되고 있어요.
* 별도 표시가 없는 사진의 출처는 Netflix임
G: 네, 저도 영화관에 가서 디즈니와 픽사가 함께 만든 <Soul >을 보았습니다. 상상만 했던 영혼의 세계를 대형 화면으로 보니 더욱 실감이 나더라고요. 영화를 보고 나서 오늘 하루도 허투루 살면 안되겠다 생각했습니다.
P: 동감입니다. 저는 넷플릭스에서 1월 말에 스트리밍으로 공개한 영화 <The Dig>('발굴'이란 뜻)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선 제목만 보았을 때는 2014년 호주 출신 배우 러셀 크로우가 처음 메가폰을 잡고 주연을 맡았던 <The Water Diviner> (호주의 황야에서 우물 파는 사람)가 떠올랐습니다.
G: 저도 그 영화 보았는데요. 1차대전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ANZAC)이 영국군과 함께 오스만 투르크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했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한 전쟁영화 아니었어요? 호주군으로 참전한 아들 3형제를 잃은 아버지가 아들들의 유해라도 찾겠다며 무작정 터키를 찾아간 이야기로 기억합니다만.
P: 네, 맞습니다. <The Dig> 은 그와 비슷하게 2차대전 개전을 앞두고 런던에서의 방공훈련, 주민대피, 문화재 보존대책이 여실하게 클로즈업됩니다. 포소리, 총소리는 안들려도 라디오의 긴급뉴스 속보, 상공을 비행하는 폭격기 편대, 인근 호수에 추락한 훈련기에서 전쟁의 긴박감, 초조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어요.
G: 저는 아직 영화평도 못 봤는데, 우물 파는 일이 아니라면 무슨 유물발굴에 관한 영화인가요?
P: 영화의 무대는 유럽 대륙의 로테르담을 마주보고 있는 잉글란드쪽 서포크 지방의 서튼 후(Sutton Hoo)[1]라는 들판이고 스토리라인은 그곳에서 벌어진 고대유물의 발굴 현장 이야기입니다.
G: 우리나라 경주의 천마총이나 부여의 무녕왕릉 같은 역사적인 발굴 현장이었나요?
P: 들판 한쪽에 큰 둔덕이 있는 것에 관심을 갖고 토지 소유자인 부인이 이웃마을의 땅꾼을 부릅니다. 할아버지 대부터 그 지역의 땅 파는 일을 해와서 땅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영감님이었지요. 부인은 그를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대우를 해주는데 그 자신은 단지 땅 파는 사람(excavator)이라고 말합니다.[2]
G: 그곳에서 뭔가 대단한 유물이 나왔나요?
P: 그것은 영화를 보시면 바로 나옵니다. 한 가지 힌트를 드린다면 그 지역은 프랑스 노르만디 지방을 지배한 바이킹 족이 자주 침공했던 곳인데 그보다 몇 백년 앞선 호화로운 유물이 발굴됩니다. 유물은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전시되어 있지만 유물 발굴터를 Royal Burial Ground라 부르고 고선박(古船舶)을 비롯한 각종 유물의 복제품을 전시한 기념관이 서 있지요.
G: 고선박이라니요? 바닷가가 아니라 강에서도 좀 떨어진 들판인데 배가 침몰한 것은 아닐텐데요.
P: 영국사에서 기록이나 유물이 별로 없어서 '암흑시대'라 일컬어지는 시대의 앵글로 색슨 왕(대부분의 고고학자는 이 지역 East Anglia를 지배하다 620년에 죽은 Raedwald 왕이라고 추정함)이 사후에 호화로운 배를 타고 저승에 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영국에는 매장 풍습이 생기기 전이어서 권력을 가진 왕이나 귀족은 시신을 부장품과 함께 배에 실어 땅에 묻었다고 하죠.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앵글로 색슨 족이 대륙에서 건너온(渡來) 게르만족이라 한다면 히틀러가 영국 침공을 준비하는 시기에 지상에서는 1천수백년 전에 바다를 건너온 게르만족의 유물을 발굴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G: 역사나 고고학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 치더라도 2시간 짜리 영화가 될 만큼 재미나 감동의 요소가 있는가요?
P: 네, 그점이 이 영화감상의 묘미, 아니 원작 소설의 묘미라 할 수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독학으로 고고학을 공부한 땅파는 경험 많은 영감님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전문(elite) 고고학자들이 참여하여 그 영감님은 허드렛일이나 시키고 자기네들이 발굴작업을 주도하려 들지요. 일종의 계급간 갈등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러자 몇년 전에 남편을 여의고 십대의 아들을 데리고 사는 토지소유자인 부인이 그 영감님의 성실성과 진지한 자세를 높이 사서 영감님의 약할을 거듭 강조하고, 또 전문 발굴팀이 6~7세기의 유물을 런던 박물관으로 옮기려는 것을 저지하는 데서 긴장감이 고조됩니다.[3]
G: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엿볼 수 있는 라이선스, 이른바 '자격증 도장값'이라고 하는 것 아닌가요?
P: 네, 맞습니다. 동명의 원작소설을 쓴 존 프레스톤(1953 ~ )은 선데이 텔레그라프지의 TV비평을 담당하는 기자인데요. 자기의 친척 아주머니가 1939년의 발굴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기에 그때의 비화를 버무리고 작가적 상상력을 더하여 르포나 다큐가 아닌 넌픽션 소설을 2007년 5월에 발표했습니다. 말하자면 아마추어 고고학 연구자가 실질적으로 유물을 발굴했음에도 사람들은 그의 공을 알아주지 않고, 고고학 석사나 박사학위 같은 소위 라이선스가 있는 사람들이 그 공을 가로챈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볼 수 있어요.
G: 아까 말씀하신 Water Diviner는 영국의 처칠 해군장관이 터키의 케말파샤 장군의 존재를 모르고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감행해 패배를 자초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죠.[4] 관객들은 그러한 전쟁의 참상보다 주인공이 터키 여인과 벌이는 러브라인에 심쿵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모의 하숙집 여주인이 타준 커피가 너무 달아서 러셀 크로우가 벌떡 일어났는데 그것이 그녀만의 전통적인 사랑의 고백이라는 걸 다음 순간 깨달았잖아요?
P: 원작소설과 영화에서도 역사적 사실과 다른 스토리가 덧입혀졌다고 합니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시대상을 정확히 반영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인 스토리의 전개는 작가의 전적인 권한에 속하는 창작 아니겠습니까? 논문을 쓰는 것(fact)은 학자에게 맡기고, 작가는 독자나 관객이 흥미를 느끼고 작품(fiction)에 몰입할 수 있게끔 러브라인을 삽입한다든가 새로운 장치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이를 '팩션(faction)'으로 분류하기도 하죠. 그래서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Literary License', 예술적으로 묘사하면 'Artistic License', 시인인 경우에는 문법이나 어순을 자못 무시해도 되는 'Poetic License'라 한답니다.[5]
G: 그 영화를 볼 때 참고하게끔 몇 가지 '예술적 허용' 사례를 말씀해주시죠.
P: 스포일러가 아닌 범위에서 말씀드리지요. 실제 발굴작업은 1938년부터 몇 차례 걸쳐 이루어졌는데 영화에서는 독일과의 개전(1939. 9. 3)에 맞추기 위해 1939년 시작된 것으로 설정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등장인물에 있어서는 이디쓰 프리티 부인의 사촌동생이 발굴작업을 사진 기록으로 남기고 공군 조종사로 소집되는데 그는 실존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작가가 신혼인 남편의 동성애 성향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 여성 고고학자의 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설정한 것이었어요.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에 이은 영국 정부의 대독 선전포고와 훈련기 추락, 군대 소집 등의 긴박한 상황을 고조시키기 위해 입대 전야의 러브라인을 만들어 넣은 것이라고 해요. 적잖은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아주 기분 좋은 라이선스 아닐까요?
Note
1] 구글 지도에서 이 영화의 무대인 Sutton Hoo 지명을 찾아보면 그와 관련된 사진이 대부분 National Trust 소유의 건물과 토지인 것으로 나온다. 영화 속 미망인이 발굴작업이 끝난 후 1942년 지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에 유물을 인근 입스위치(Ipswich) 박물관이 아니라 런던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기증하기로 한 것도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물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전쟁 후 상속자인 아들이 이곳에서 살지 않고 그 후 몇 차례 건물과 토지의 주인이 바뀌었다. 1997년 마지막 소유자가 영국 National Trust에 기증하면서 유서깊은 이곳 부동산이 공익 목적의 국민신탁법인 소유가 된 것이다. 영국의 이러한 National Trust를 본떠 우리나라에도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이 제정되었다.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는 그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아주 상세한 앵글로색슨 왕가 매장지 안내서를 인터넷에 올려 놓았다.
2] 이 영화의 배역은 호화 캐스팅이라 할 만하다. 여주인공 이디쓰 프리티는 여러 영화제 수상경력이 있는 30대 중반의 캐리 멀리건이 나이 들어보이게끔 분장하였고(당초 실제 나이 53세인 니콜 키드만이 유력 후보였다고 함), 독학의 발굴전문가 바질 브라운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볼더모트, 007 스카이폴의 신임 M 역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랄프 파인즈가 시골 영감님 역을 능숙하게 수행했다. 실제로 발굴현장에서 맨처음 금장식 유물을 발견한 페기 피고트는 신작 Rebecca 등의 영화와 TV, 연극무대에서 활발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릴리 제임스가 맡았다.
3] 서튼 후에서 발굴된 유물이 기증자의 사후 9년만에 처음 전시되었을 때 바질 브라운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대영박물관에 마련된 서튼 후 유물 전시실에서는 기증자의 요구에 따라 바질 브라운의 이름도 당당하게 올라 있다. 고고학에서는 전문분야의 학위소지 유무가 중시되지만, 손이 많이 가는 글이나 그림에서는 이름 없는 대리작가의 존재가 종종 문제가 되곤 한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나라에서 조영남의 대작(代作) 사건으로 클로즈업되었거니와 유령작가(ghost writer), 도제식, 협업(collaboration), 예술계 관행, 엘리트주의, 상업주의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포장되어 논란을 빚어 왔다. 영화계에서는 '로마의 휴일', '빠삐용', '스파르타쿠스' 등의 대본을 쓴 달톤 트럼보가 유령작가로 유명했다. 그는 공산당에 입당한 경력 때문에 헐리웃에 매카시 선풍이 불면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을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4] 영화 The Dig 에서 제1차대전 당시의 갈리폴리 전투를 다룬 영화 The Water Diviner를 떠올린 것은 두 영화 모두 땅 파는 것이 업인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세 아들을 잃은 부성(父性)은 무작정 갈리폴리 전쟁터의 땅에서 아들의 흔적을 찾고자 온갖 애를 쓴다. 그러다가 어느 마을에서 호주식 풍차 양수장치를 발견하고 자기 아들이 이곳에 숨어 있음을 직감으로 알아챈다. 왜 호주에서 우물 파던 젊은이가 낯선 이국 땅에서 숨어지내야만 했을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독일 연합국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손발을 묶어놓을 필요성을 절감했다. 수에즈 운하를 확보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면 유럽과 소아시아가 접한 다나넬스 해협을 장악해야 했던 것이다. 연합군 함대가 흑해로 진출할 수 있다면 러시아도 방어하고 오스만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오스만 제국 군대는 연전연패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호주-뉴질랜드 연합군(ANZAC)을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시키면 땅 짚고 헤엄치기로 필승을 확신했다. 오스만 정부도 막강한 앙탕트(Entente) 군사력에 겁을 먹고 반제국 성향의 케말 파샤 장군에게 소규모 병력만 주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영국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1915년 4월 25일 ANZAC 젊은 병사들이 갈리폴리에 상륙은 했으나 케말 파샤 군대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오합지졸을 천하무적의 정예군사로 조련해 놓은 케말 파샤의 존재를 몰랐던 게 처칠과 연합군 지휘부의 치명적 오산이었던 것이다. 결국 8개월간 피아간에 수십만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킨 채 ANZAC 연합군은 갈리폴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호주는 8,700여 명, 뉴질랜드는 2,700여명의 희생자가 나왔으니 가정뿐만 아니라(영화 Water Diviner의 스토리) 나라가 결딴날 판이었다. 그래서 호주는 시드니에 ANZAC Memorial을 세우고, 두 나라는 매년 4월 25일을 ANZAC Day로 추념하고 있다.
5] 우리나라에서 예술적 라이선스를 적용한 가장 유명한(bestseller) 역사소설은 전 이화여대 교수 이인화(본명 류철균)의 「영원한 제국」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도 국역이 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느니 만큼 작가적 상상력에 더하여 문학적 라이선스를 구사한다면 The Dig 소설이 나왔을 때 독자들의 반응처럼 "왜 이 소설이 이제야 나왔지?"하고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적인 라이선스(Poetic License)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지만 KoreanLII의 Repentance (회개) 항목에도 소개한 영국 존 다운랜드 (엘리자베스 왕조의 유명한 류트 연주가 작곡자 겸 시인)의 "나의 불평이 열정을 움직일 수 있다면"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제목과 첫 줄의 If my complaints could passions move를 문법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나 둘째 줄 이하가 Or make Love see wherein I suffer wrong:/ My passions were enough to prove,/ That my despairs had governed me too long. 으로 되어 있어 운(rhyme)을 맞추기 위해 Poetic License를 사용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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