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세잔과 모네의 아틀리에

Whitman Park 2023. 5. 2. 21:25

코로나가 풀리면서 3년만에 실행에 옮긴 이번 프랑스 일주 여행에서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인 폴 세잔(Cezanne, 1839-1906)과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아틀리에를 직접 가 보았다는 것이다.

비록 고인이 떠난지 오래고 관광객들의 관람을 위해 다소 변형되었다 해도 창작 현장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패키지 투어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여러 관광객들 틈에 섞여 해설을 들으며 제대로 관람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동안 몰랐던 그림 탄생의 비화를 비롯한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잔의 스튜디오는 화가가 태어나 법과대학까지 다녔던 액상프로방스 외곽의 높은 언덕 위에 있다. 그가 60점 이상 즐겨 그렸던 생트빅트와르(Sainte Victoire) 산이 조금만 걸어나가면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튜디오 주변에 많은 주택과 건물들에 포위되다시피 둘러싸여 있다.  

 

*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세잔 스튜디오 앞 마당
* 세잔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생트 빅투아르 산 (1897), 미국 볼티모어 미술관 소장.

 

세잔 스튜디오는 미국인 재산관리인이 액상프로방스 대학에 위탁하여 관리하고 있는데 우리는 점심시간을 피해 예약한 시간대에 14명씩 2층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원봉사 대학생의 설명을 들으며 화가가 어떤 모습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상상해볼 수 있었다.

우선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 대작을 그릴 수 있도록 천장이 매우 높았으며 북쪽으로 큰 창이 나 있고 천장이나 벽쪽에 아무런 인공조명도 없었다. 그리고 벽을 따라 그림도구와 정물화에 쓸 과일 같은 소품들이 놓여져 있었으며, 그가 특별히 부탁해서 구한 해골도 3점이나 있었다. 한쪽 선반에는 관절을 움직일 수 있는 상당히 정교한 목각 인형이 앉아 있었는데 오랜 시간 부동의 자세로 포즈를 취할 모델을 구할 수 없자 파리에 특별히 주문하여 만들어 온 것이라 했다.

 

 

다시 말해서 세잔은 정물화를 그릴 때에도 여러 각도에서 수십 번 다시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런 식으로 그의 눈이 ‘진짜로 보는 것’을 그려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그 결과 여러 관점에서 많은 시간에 걸쳐 관찰한 것을 대담하게 합쳐놓은 것이기에 다소 기괴하게도 보인다. 그러나 피카소 같이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 화가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입체파(Cubism) 그림을 창시했던 것이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세잔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법률가가 아닌 화가의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너무 실험주의에 철저하여 40대 후반이 될 때까지도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중학교 동창이자 같은 예술가로서 교분을 나눴던 사실주의 작가 에밀 졸라 (1840~1902)와도 그의 작품(L’oeuvre, 1876) 속에 나오는 실패한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하여 쓴 것이라며 절교를 선언했다. 그는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던 아주 까칠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악수는 물론 가벼운 신체접촉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그리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창밖으로 내던지기 일쑤였다.

 

* 자신의 그림 The Bathers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세잔
* 담 밖에서 바라본 세잔 스튜디오(북쪽 면)

 

반면 클로드 모네는 성격이 원만하여 그의 삶에는 수많은 친구와 스승, 조력자, 후견인이 등장한다.

모네는 파리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이 르아브르로 이사하자 그 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그곳의 화가인 외젠 부댕을 만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자연광 묘사에 대한 기초적인 화법을 배웠다. 또한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를 알게 되어 그로부터 공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을 익힐 수 있었다.

 

모네는 19세 때 파리로 유학을 갔으나 국립미술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대신 카미유 피사로 등 다른 젊은 예술가들과 교유하였다. 1860년 군대에 징집되어 1년간 알제리에서 복무했는데, 장티푸스에 걸려 전역했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샤를 글레르 밑에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드릭 바지유 등과 어울리며 그림에 정진했다. 이들의 우정은 훗날 인상주의 미술을 탄생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 모네가 아내와 아들을 모델로 그린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꽃 (1873).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67년 그의 뮤즈이며 애인이었던 카미유 동시외가 그의 첫아들 장을 낳았다. 1869년 르누아르와 함께 파리에서 가까운 센 강변의 라 그루니에르에서 함께 작업했다. 1870년 모네는 카미유와 결혼했으며, 이듬해 발발한 보불전쟁을 피해 잠시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는 윌리엄 터너, 존 컨스터블 등 영국 화가의 작품을 접하고 명쾌하게 색채를 표현하는 기술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었다.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했다. 1873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으로 이뤄진 무명 예술가 협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훗날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을 열어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다. 이 전시를 관람한 비평가가 모네의 이 그림을 보고 조롱의 의미를 담아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함에 따라 인상파란 이름이 그들 화가의 집단에 붙여지게 되었다.

 

모네는 1876년 미술품 수집가인 금융인 에르네스트 오셰데 부부를 만나 작품을 의뢰받았다. 2년 뒤 후원자인 오셰데가 불경기로 파산을 하고 잠적해 버리자, 그의 아내 앨리스와 여섯 자녀를 모두 자기 집에서 거두었다. 앨리스는 병환 중인 모네의 아내를 간호하고 집안일을 거들었으며, 앨리스의 셋째 딸은 기꺼이 모네의 모델이 되었다. 첫 부인 카미유가 1879년 병으로 사망한 후 1883년 모네는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Giverny)로 이사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으며, 1892년 에르네스트가 사망하자 모네는 앨리스와 재혼했다.

 

* 지베르니를 흐르는 센 강
* 센 강물을 끌어들여 조성한 연못. 사진 중앙에 등나무꽃이 피어 있는 일본다리가 보인다.
* 모네 정원은 튤립을 비롯한 봄꽃들이 만개하여 아름다움을 더했다.
* 그가 정성들여 가꾼 정원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네

 

모네는 기차를 타고 노르망디와 파리를 오가면서 센 강을 끼고 있는 지베르니의 풍경에 감탄하곤 했는데 비로소 마흔이 되어 그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고 재정적으로 여유를 갖게 되자 젊었을 적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는 그 지역의 농가를 사서 살림집으로 개조하고 넓은 정원에 여러 명의 정원사를 두고 철 따라 꽃을 피우는 수많은 화초와 식물을 재배했다. 정원 앞에 연못을 조성하고 센 강의 물줄기를 일부 돌려 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지베르니 시당국의 불허 처분에 맞서 법원에 호소한 끝에 4년만에 숙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 모네 생전의 아틀리에. 오늘날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모네 살림집의 주방에 있는 수많은 팬과 요리기구는 그의 식구도 많았지만 찾아오는 손님도 적잖았을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모네는 아틀리에 안에서 작업하는 시간보다 햇빛 아래서 주로 지베르니의 정원과 연못가의 화초와 인물을 즐겨 그리곤 했다.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는데 '수련(Water Lilies)'이 대표적이다.

 

모네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평화를 기리는 의미에서 가로 길이가 총 100m가 넘는 그의 연작 수련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튈르리 궁의 오렌지나무 온실 오랑주리 건물 안에 작품 전시가 가능한 대형 타원형 홀 2개를 만들고 모네의 수련 8점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그의 수련 한 점은 이건희 콜렉션에도 들어 있어 이제 한국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 지베르니 연못의 일본다리. 지금은 거치대를 만들고 등나무를 올렸다.
*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상설 전시 중인 모네의 수련

 

세잔과 모네 모두 서양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大화가들이다. 하지만 인품이라고 할까 친화력 있는 작품의 스케일이라 할까 그들의 아틀리에를 찾는 관광객들은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된다.

두 곳 모두 화가의 그림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창작의 현장을 찾은 사람들 눈에 액상프로방스의 세잔 스튜디오에서는 안으로 수렴하는 내성적(introverted)인 기운이, 지베르니의 모네 아틀리에에서는 밖으로 자연 속으로 발산되는 외향적(extroverted)인 기운이 크게 느껴졌다.

 

P. S.

롯데관광의 패키지로 간 우리 일행은 인솔자가 인터넷으로 예약했던 만큼 메이데이 연휴 기간 중임에도 모네 정원과 아틀리에를 편히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잔 스튜디오 출입문에 미국 관리인이 현지 대학교에 위탁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한 현판이 붙어있는 것을 보았기에 모네 정원에 대해서도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New Bing에게 모네의 집과 정원을 누가 언제부터 소유・관리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근거자료로 알려준 모네 재단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모든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클로드 모네가 1926년 12월 5일 별세하자 유일한 상속자였던 차남 미셸 모네가 유산을 물려 받았다. 그는 노르망디 정원보다 아프리카 사파리가 더 좋았기에 모네의 집과 정원은 모네의 장남과 결혼하였던 의붓딸 블랑셰가 거주하면서 돌보았다. 그러나 블랑셰가 1947년 죽은 후에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1966년 미셸이 후사 없이 자동차사고로 사망했으나, 다행히 모네의 재산과 컬렉션을 샤이요 궁을 설계한 자크 칼루가 이끄는 미술협회(Academie des Beaux Arts)에 기증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재원부족으로 복원은 엄두도 못내던 차에 자크 칼루가 1977년 사망하면서 미술협회는 지베르니 정원의 복구 사업을 베르사이유 궁을 훌륭하게 복원한 제럴드 반데르 캠프(Gérald Van der Kemp)에게 맡겼다. 이에 따라 반데르 캠프 부부는 미국 마세나 협회(American Maecenas)에 호소하여 수많은 독지가의 헌금을 받아 복원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크게 손상된 원형을 살릴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모네 정원에 관한 사진과 그림, 관련 물품을 내놓았다.

 

3년에 걸친 복원 사업 끝에 모네 집과 정원은 옛 모습을 되찾고 1980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같은 해  미술협회는 모네의 집과 정원, 소장품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클로드 모네 재단(Fondation Claude Monet)을 설립하였다. 모네의 집에 있는 모네의 그림은 대부분 복제화이고 원화는 미술협회가 운영해온 파리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네의 집과 정원은 매년 4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 7개월 동안 세계 각국에서 50만명 이상이 찾는 관광명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사연을 듣고 보니 일찍이 미국 로드 아일런드의 뉴포트에서 보았던 대저택(New Port Mansions)과 비슷한 운명을 갖고 있어 흥미로웠다.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한 대저택 건설 → 상속인이 관리상의 애로와 세금 문제 등으로 공익단체・재단에 기부 → 지역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유지・관리 → 일반에 공개하여 관광명소로 변신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액상프로방스의 세잔 스튜디오

지베르니의 모네 정원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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