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걸어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게 축복일까?
꽃길만 걷는다면
예쁘고 진기한 꽃도 보고
꽃향기도 그윽하겠지.
하지만
떠들썩 구경하는 사람도
훼방꾼도 적잖을 거야.
무엇보다도
그 꽃길에서는 누가 물을 주며
가루받이할 벌 나비는
어떻게 끌어 모을까!
지난 3월 말 강원도에 갔을 적엔 봄꽃이 아닌 눈꽃송이를 보아 전혀 뜻밖이었다. 그렇기에 강릉 경포호에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로 떠났다.
진부 오대산역에 내렸을 때 진부택시의 안희진 기사가 4월 14일까지 삼척 맹방리에서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고 귀띔해줬다. 근덕 IC로 나가면 도로변의 가로수 벚꽃도 아주 볼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아침 맑은 날씨임을 확인하고 처음 가보는 삼척 맹방리로 떠났다.
과연 삼척 근교의 맹방리에서는 벚꽃이 만발한 가로숫길 옆 너른 밭에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 있었다.
이것을 보러 온 승용차와 관광버스들이 도로변에 줄지어 서있었다.
우리도 임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행사장으로 갔다.
소란스럽고 붐비는 축제 행사장을 벗어나 이제 절정이 지난 가로수 벚나무를 한 번 올려다 보고 맹방리를 떠났다.
여기까지 왔으니 삼척 추암 촛대바위를 볼 차례였다.
마침 동해 킹크랩 마을에서 크랩킹 페스타가 열려 역시 많은 사람이 몰려와 있었다. 그러나 동해 해변의 바닷가에는 촛대바위 같은 기암괴석을 보고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그 이튿날 어제보다 시계(視界)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하늘은 아주 맑았다.
당초 계획했던 경포호반의 벚꽃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서울 경희대 캠퍼스나 여의도의 벚꽃은 이미 진 뒤였으므로 긴가민가 하는 심정이었다.
촛대 바위를 보고 나오는 길 북평산업단지 L사의 케이블 공장에 우뚝 서 있는 타워가 눈에 띄었다.
해저에 설치할 長케이블을 만들기 위해서는 저런 이색적인 고층 타워가 필요하리라 여겨졌다.
바닷속 장애물이나 어류의 공격, 높은 수압도 견뎌낼 수 있고 수 킬로씩 끊김 없이 장거리를 시공해야 하는 케이블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극한 조건에서 테스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강릉 강문해변 백사장에 앉아서 잔잔한 바다 물결을 멍 때리며 바라보았다.
나도 팬데믹 이후에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멍 때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데 옆에서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을 볼 때 그들의 넘치는 젊음이 우리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연속 이틀 꽃길만 걷다가 (드라이브 포함) 젊음의 활력(energy, vitality)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젊은이에게는 꽃길만 걷는 기회를 주어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가 백영옥 씨가 쓴 글이 생각났다.
빛이 환하면 그림자가 짙다. 입에 쓴 약이 효과가 큰 것처럼 말이다. 마감이나 발표 날짜가 여유로우면 더 좋은 결과를 낼까. 그렇지 않다. 시간, 인원, 날씨, 비용 같은 제약이 오히려 창의성을 촉발할 때도 많다.
타노스 없는 어벤저스를 상상할 수 있을까. 조커 없는 배트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건 우리를 더 강하게 한다는 니체의 말을 세심히 헤아려야 한다. 사계절 내내 피어 있는 꽃은 없다. 꽃길만 걷자는 말은 판타지다.
삶에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만 이어지면 땅은 사막이 된다. 출처: 조선일보, "꽃길과 사막", [백영옥의 말과 글 284], 2022.12.31.
맞는 말이다.
나같은 은퇴한 사람 말고 젊은이들에게 "꽃길만 걸어라" 하는 것은 축복(blessing)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역경과 시련이 닥쳐도 굴하지 말고 희망을 갖고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나아가라고 격려(encouragement) 해줘야 한다.
그런 빈 말보다는 힘을 낼 수 있는 맛있는 밥을 사주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만일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사도 바울의 말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며(사도행전 14:22) 꽃길이 아님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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