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파보 예르비와 임윤찬의 협연 무대

Whitman Park 2024. 12. 20. 10:00

서울 예술의 전당에 아내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

남자가 나이가 들면 와이프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12월 초엔 교토 디자인 투어에 따라간 데 이어 이번엔 H은행 큰 고객인 아내가 어렵게 구해온 로얄석 티켓을 받아들고 간 것이다. 

 

에스토니아 출신 파보 예르비(Paavo Järvi, 1962-  )가 지휘하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한국의 자랑 임윤찬이 협연하는 무대라고 해서 기대가 컸다.

약관의 한국 청년이 미국의 반클라이번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할 때의 그 극적인 장면을 기억하기에, 또 2024년에는 그라모폰 상 등 유럽의 권위있는 여러 클래식 음악상을 수상했기에 저녁 시간에 예술의 전당에 물밀듯이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놀랍지 않았다.

한국의 영 아티스트들이 세계 유수의 음악상을 받는 것도 국민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날은 임윤찬 협연 외에도 예술의 전당 각 홀마다 여러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 주차장 들어가는 입구도 차량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콘서트홀에 입장할 때 보니 티켓 검사를 사람이 하는 게 아니었다. 공항의 출입국심사도 게이트에서의 항공권 검표도 모두 QR코드 판독기로 하는 것처럼 스탠드형 리더기에 티켓을 올려놓고 파란불이 켜지자 입장할 수 있었다.

홀 안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H은행 VIP고객 외에도 나도 응모했다가 떨어진 C신문 장기독자 당첨자들로 좌석이 다 채워진 듯했다. 

무대 가까운 좌석에서 보니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은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아니었고 단원도 모두 40명이 안되는 모양이었다.

 

무대 한 켠에는 두 번째 순서인 협주용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무대에 가까운 좌석에서는 연주자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 제일 가까운 콘트라베이스의 음이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호른과 클라리넷 등 관악기 소리가 뚜렷하게 구분되어서 들리는 것은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  

 

* 공연 전에 열심히 콘트라베이스 조율을 하는 연주자들의 준비 정신이 돋보였다.

 

개막 시간이 되자 제각기 악기를 손에 든 단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윽고 북독일 함부르크와 쾰른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을 맡아 20년간 호흡을 함께 해온 파보 예르비가 포디엄에 오르자마자 연주를 시작했다. 

첫 순서는 슈베르트가 작곡한 이탈리아 풍의 서곡 D.591이었다.

빠르고 경쾌한 멜로디가 흐를 때에는 지휘자의 손놀림이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두 번째 순서로 연미복을 입은 임윤찬이 등장했다.

이미 피아니스트 거장(巨匠)의 반열에 들었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일까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나이 어린 대학생 같아 보였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나올 때 좌우로 몸을 흔들며 리듬을 타는 듯하더니 지휘자가 그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부터 임윤찬의 정확하고 부드러운 타건이 시작되었다.

 

다음은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가 임윤찬이 연주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고 아래와 같은 감상평을 남겼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갓 스무 살에 발표했던 청춘의 협주곡을 갓 스물의 피아니스트가 들려주었다고 소개했다.

 

*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의 협연 장면. 출처: 빈체로/조선일보

 

첫 악장부터 파격의 연속이었다. 과도한 탐닉에 빠져들기보다는 화려한 속주(速奏) 속에서도 간간이 견고한 저음을 드러냈다. 오케스트라 역시 현의 떨림을 뜻하는 비브라토(vibrato)를 한껏 절제해서 산뜻함과 날렵함을 더했다.

이날의 절정은 느린 2악장. 드문드문 정적을 가미하면서 숨죽인 채 피아니시모(아주 여리게)로 노래하는 듯한 모습에 피아니스트가 독창자로 변모한 것 같았다. 지난달 임윤찬이 뉴욕 필하모닉과 이 협주곡을 협연할 당시 뉴욕타임스(NYT)가 2악장에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NYT는 “이 악장은 성악 없는 오페라 아리아이며, 임윤찬은 훌륭한 성악가처럼 화려한 장식들이 형식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음악의 길고 지속적인 중심 라인을 강조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고 평했다. 반대로 마지막 3악장에서는 분명한 리듬감을 통해서 춤곡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이후 그의 음반과 실연(實演)에 이처럼 호평이 쏟아지는 것도 분명 ‘청신호’다.

이날 앙코르로 임윤찬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가운데 첫 곡 ‘아리아’를 들려줬다. 내년 뉴욕 카네기홀 등에서 변주곡 전곡을 연주할 것이라고 이미 밝혔기에 일종의 짧은 ‘예고편’이 됐다. 흡사 자유분방하면서도 과감한 꾸밈음들을 통해서 선배 피아니스트들의 바흐와는 다를 것이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 연주가 모두 끝난 후 지휘자와 단원들이 무대 뒷편에 앉은 관객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있다.
* 지휘자 파보 예르비는 우레같은 청중들의 박수에 화답하듯 앙코르 곡을 2곡씩이나 선사했다.

 

연주가 끝나자 임윤찬은 지휘자와 손을 잡고 관중의 환호와 박수에 화답했다.

일단 퇴장했던 임윤찬이 몇 차례 무대 위로 나오고 들어가기를 반복하다가 이윽고 혼자 나와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조용하게 흐르는 선율이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었으나 매우 아름답게 들렸다.

15분간의 인터미션 시간에 밖에 나갔다 온 아내가 입구에 앙코르 곡의 곡명이 적혀 있다면서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 임윤찬과 파보 예르비의 앙코르 곡명이 홀 입구에 게시되어 있다.

 

2부에서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41번 '쥬피터'의 연주를 들었다. 콘트라베이스가 3명으로 늘고 팀파니 연주가 돋보이면서 그리스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 신을 웅장하고 강력하게 묘사하는 것 같았다.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선율의 제1악장에 이어 조용하고 느린 제2악장, 짤막한 제3악장, 모든 것을 마무리짓는 제4악장이 끝났다. 객석 여기저기서 브라보를 외치고 소리를 지르며 힘껏 박수를 쳤다.

 

파보 예르비 지휘자도 여러 차례 나오고 들어오기를 반복하다가 지휘봉도 없이 앙코르 곡을 연주했다.

첫 곡은 북유럽 어느 나라의 장중한 국가(anthem) 같은 느낌었고, 박수가 그치지를 않자 클라리넷 주자와 함께 등단하여 두 번째로 연주한 곡은 아주 구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Valse triste)'였다.

마침 YouTube에 핀란드 출신 피에타리 인키넨이 지휘하는 KBS 교향악단이 같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연주한 뮤직비디오가 있어서 여기에 나란히 올리고자 한다.

 

 

12월 초의 교토 디자인 투어 때에도 느꼈던 바이지만 한 나라의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뛰어난 예술가가 숫적으로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의 작품과 공연에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객과 청중, 그리고 이를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어 언론과 SNS를 통해 국내외에 전파하는 비평가의  3요소가 갖춰져야 함을 실감했다.

내가 올린 시와 미술, 음악에 관한 블로그 기사도 누가 읽을지는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의 소감이 누구에겐가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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