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에는 양재동 횃불회관에 자리잡은 양재 온누리교회에 오가는 것이 즐겁다.
양재 환승역 주차장에서 교회 뒷산을 넘어다닐 때 온갖 꽃들과 초록빛 짙어가는 숲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요즘은 꽃 이름을 몰라도 스마트폰(구글렌즈)으로 찍어보면 이름을 알아내기 어렵지 않다.
온누리교회 QT
5월 첫 날은 꽃들도 많이 졌고 나뭇잎이 한층 무성해져 오솔길이 단조로워졌지만 나로서는 감회가 남달랐다.
이날 새벽 순장공부 시간에 내 차례가 되어 QT의 시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매주 목요일 이른 아침이면 공동체의 리더십이 교회에 모여 목사님 지도 하에 주말 구역예배 때 순원들과 같이 나누게 될〈생명의삶〉QT 과제를 미리 공부하고 있다.
내가 발표했던 QT 대상이 된 성경구절은 민수기 17장 1~13절 중 10절의 말씀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반역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표로서 보관하여라. 이것으로 나에 대한 저들의 불평이 끝나게 해 그들이 죽지 않게 하여라.”
모세의 인도로 종살이 하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여호와의 10계명을 받고 순조롭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 땅을 정탐한 12지파의 대표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함에 따라 그들은 가나안 땅에 진입하지 못한 채 여호와의 진노를 받고 광야를 유랑하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비판의식을 가진 고라와 그 일당이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회중의 총회 위에 당신들이 군림하러 드느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모세는 누가 여호와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것인지 알아보자며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렸다.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고라와 그의 가족 및 소유물은 땅이 갈라져 빠져 죽고, 나머지 일당은 향로 앞에서 불에 타 죽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두려워하자 모세는 12지파의 지도자들에게 지팡이를 가져와 증거궤(십계명 돌판을 안치한 성막 안의 언약궤) 앞에 두고 여호와가 누구 것을 택하시는지 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이 고조되어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자 리더십의 정통성을 여호와의 선택에서 찾아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리하여 12지파는 기회의 균등, 절차의 공정성이 보장되는 가운데 여호와의 주권적 선택에 따른 결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아론의 지팡이에서 하룻밤 새 싹이 트고 꽃이 핀 다음 아몬드 열매까지 맺는 것이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수분의 공급도 없이 단단하고 메마른 나무 지팡이에서 이틀 만에 싹이 나고 꽃이 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증표로서 아론의 지팡이는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 만나를 담았던 대접과 함께 언약궤에 보존되었다.
아몬드꽃의 상징적 의미
특별히 내가 주목한 것은 아몬드꽃(혹은 살구꽃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음)이었다.
젊어서 신학을 공부하고 탄광촌에서 목회횔동을 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아론의 지팡이와 아몬드꽃의 상징적 의미를 알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1890년 아를의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신혼 초의 동생 테오로부터 반가운 편지를 받았을 때 마음 속으로 작정했다. 테오가 아들을 낳았다며 재능 많고 용기 있는 형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줬다고 편지에 적혀 있었다.
반 고흐는 초라한 행색의 무명화가인 자기와는 달리 조카는 화사한 아몬드꽃처럼 활짝 피어나라는 염원을 담아 창밖에 피어 있는 아몬드 꽃나무를 그려 테오에게 축하 선물로 보냈다. 자기와 같은 이름을 가진 조카의 방에 걸려 있었던 이 그림은 빈센트 반고흐의 '시그니처 그림'이 되었다.
큰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조카는 어머니 요한나를 통하여 아버지와 삼촌이 어떤 분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상속받은 큰아버지의 작품들을 네덜란드 정부에 영구 임대하는 형식으로 기증했다. 그 결과 암스테르담에는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이 건립되었으며, 화가의 생전에는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던 그의 모든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1]
⇒ 한글 위키백과의 요한나 반 고흐 봉허에 관한 감동적인 스토리 참조
목사님의 메시지
교회 공동체에서 담임목사 주재하에 순장공부를 하는 것은 순장의 의욕이 넘친 나머지 교회의 교리 강령과 어긋나거나 잘못된 성경 해석을 막기 위함이다.
우리 공동체의 이한규 목사님은 민수기 17장의 배경이 되는 민수기 14~16장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한 후 17장에서 하나님이 취하신 행동을 한 줄로 요약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과 반역이 계속되자 하나님은 반기를 든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모세와 아론의 권위와 리더십을 다시 확립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여호와에게 불평하는 것을 그치게 하시고, 아몬드 꽃이 핀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놓아 반역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표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로 인해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끝으로 이한규 목사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기회평등을 보장하는가〉(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를 인용하면서 이른바 학벌 좋고 능력 있다는 사람들은 용케도 그런 지위에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학력이나 재능이 다소 부족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선 아니되며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앞장서야 함을 강조했다. 이를 테면 세상적 관점에서 운이 좋다는 것은 믿음의 관점에서는 그가 자격이 없음에도 값없이 은혜를 받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2]
슈베르트의 피아노 삼중주 2번
4월 말 어느날 저녁 KBS 1FM 클래식 방송 시간에 슈베르트 피아노 삼중주 2번에 관한 해설을 듣게 되었다.
전기현 진행자는 과연 프란츠 슈베르트는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전혀 빛을 보지 못한 게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주옥같은 관현악곡, 예술가곡을 작곡한]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슈베르트에게도 짧지만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1827년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를 썼고 존경하던 베토벤과 짧은 만남을 가졌고 그리고 피아노 3중주 2번 도이치 번호 929를 완성했지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이 탄생되던 그해에 발표한 '피아노 삼중주 2번'은 슈베르트가 생전의 찬사를 받았던 거의 유일한 작품이었습니다. 1828년 3월 슈베르트는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만으로 연주회를 하게 되는데 이때 이 곡을 직접 초연했고 이전까지 받아본 적 없는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고 하지요. 그 인기에 힘입어 이 곡의 악보는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됐는데 슈베르트 작품 중에서 오스트리아 밖에서 출간된 최초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슈베르트에게 단 한 번의 영광을 안겨 준 작품이 우리 영화 〈해피엔드〉와 미카엘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작품 〈배리 린든〉에서도 결정적인 장면에 흐르던 곡이었습니다. 또 광고에 등장하기도 했는데 도입부의 짧고 인상적인 피아노 선율과 이어지는 첼로의 조화가 무척 드라마틱하죠.
세상을 떠나던 해에 이르러서야 아주 짧게 받았던 스포트라이트, 너무 늦게 온 영광이긴 했지만 그래도 슈베르트는 무척 기뻐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슈베르트에게도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는 건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2번 E플랫 장조 도이치 번호 929의 2악장 안단태 콘모토 전해 드립니다.
출처: KBS 1FM '세상의 모든 음악' Music Inside 코너, 2025. 4. 29.
Schubert Piano Trio No.2 in E flat major, D.929 Op.100 (16:34 2nd Movement)
⇒ 오재원 교수의 클래식 이야기: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 삼중주 2번
두 예술가의 공통점
처음부터 빈센트 반 고흐와 프란츠 슈베르트를 비교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몬드꽃이나 피아노 삼중주 모두 세상에 내놓은지 1년도 못 돼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우연찮게 교회 모임에서 여러 사람과 아몬드꽃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반 고흐의 아를 시절이 떠올랐고 내가 그곳을 찾아갔을 때 반 고흐를 냉대하고 외면했던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반고흐를 내세워 관광 홍보를 하는 게 우스웠다.
또한 슈베르트 역시 피아노 잘 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 잘 부르던 안경 쓴 유쾌한 청년으로 알았을 뿐 그의 진가(眞價)를 몰라주었던 비엔나 사람들이 야속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일반 대중의 취향은 부박(浮薄)하기 그지 없고 그들이 참모습을 알아차리는 데는 여러 사람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지금도 뉴미디어가 성행하고 있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이 외면 받는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이 글에서 반 고흐와 슈베르트를 나란히 놓고 보니 그들의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여주는 몇몇 지인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 또한 숱하게 많으니까.
반 고흐의 경우 동생 테오와 나누었던 수백 통의 편지가 영어 교사를 지냈던 테오의 아내 요한나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갓 태어난 조카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그린 아몬드꽃이 아니었더라면 한낱 무명(無名)화가였던 반 고흐가 어떻게 '세기의 화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내가 QT시간에 나누었던 모세의 처지 -- 이집트에서 애써 구출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힘을 실어주셨던 그 장면이 위로가 되고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Note
1] 열정적으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던 반 고흐는 동생 테오가 파리 구필 화랑에서 일하고 있었음에도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은〈아를의 붉은 포도밭〉(1888) 한 점뿐이었다. 〈데이지와 양귀비 꽃병 〉(1890)은 아를에서 주치의였던 가셰 박사에게 진료비 대신 지급한 것이었다. 당시 인상주의 미술작품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었던 데다 반 고흐는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 터치, 정신병 경력 등으로 인해 비평가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그의 작품이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오로지 요한나가 형제간에 오간 편지를 서한집으로 출판하는 한편 유럽 각지에서 전시회를 열고 〈밤의 카페 테라스〉(1888) 등 인상적인 작품 몇 점을 판매한 데 따른 것이었다.
2] 민수기 QT를 하다가 난데없이 '아몬드꽃' 이야기를 하는 내 입장을 이해하신다는 듯 이한규 목사님이 이중섭의 은박지 그림 말씀을 꺼내셨다. 화가 이중섭이 친척어른이어서 부친이 종종 뵈러 갔었는데 담배를 싼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서 주시더라고 했다. 그러나 별것 아니라 생각하고 버렸는데 나중에 그것이 귀중한 미술작품이 된 것을 알고 크게 아쉬워 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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