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요즘 '집콕' 생활 잘 하고 계십니까?
P: 네, 영화 보는 게 취미인데 집에서 Netflix 보는 걸로 달래고 있지요. 옛날에 비디오 빌려다 보던 게 생각나더군요. 또 장거리 비행할 때 기내영화 보던 것도 생각 났어요. 한 가지 다른 점은 몇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동안 Netflix가 제 취향을 알아보고 계속 새로운 영화, 드라마를 추천해주는 거예요. 중간에 광고도 없고 10초 앞뒤로 돌려보기/당겨보기가 가능하니 한번 빠지면 몇 시간은 쉽게 보게 되는 것 같았어요. "정주행"이란 말을 새삼 실감했지요.
G: '정주행'은 연속극 볼 때 쓰는 말인데 무슨 드라마를 보셨지요?
P: Netflix 오리지널로 세 시즌에 걸쳐 방영한 "Anne with an E"[1]였어요. 스토리를 다 알기에 제외하곤 했는데 티저를 한 번 보고 여주인공 맥널티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할까요.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의 모습으로 태어난 배우였어요. 꿈 많은 수다쟁이 소녀[2]가 초록지붕의 집에 살면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숲과 들을 쏘다니는 것을 연속해서 보느라 중간에 멈추기가 어려웠지요.
G: 우리나라에서도 1980~90년대 초 TV에서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지난 몇 년 사이에 "빨강머리 앤의 추억소환"이라고 빨강머리 앤 관련 에세이, 만화, 뮤지컬, 원작자 평전이 쏟아져 나왔어요.
P: 저 역시 원작(Anne of Green Gables)을 새롭게 각색한 Netflix 드라마에서 빅토리아 시대임에도 페미니즘, 흑인과 인디언 원주민, 동성애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을 보고 많이 놀랐지요. 금광개발 사기단 같은 새로운 스토리도 추가되었고요.
G: 등장인물 중에서 누구와 가장 공명하셨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답답하기만 하던 마릴라 아주머니를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여성분들이 많던대요.
P: 저는 딸 바보 매튜 아저씨요. 하지만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꿈과 상상력을 키우고 표현하며 살았던 앤 셜리의 사고방식을 본받고 싶었어요.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말이죠.
어느 작가가 애니메이션 50부작을 보고 난 소감을 에세이[3]로 펴냈는데 앤 셜리 어록이 잘 정리되어 있어요.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면 주변을 변화시키는 어떤 '선한 영향력'이 느껴집니다.
*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 어머, 아주머니, 정말 모르세요? 한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에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을 거예요. 아,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여요.
* 그렇지만 마릴라 아주머니, 이토록 흥미진진한 세상에서 슬픔에 오래 잠겨 있기란 힘든 일이지요, 그렇죠?
*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 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나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내 속엔 여러 가지 앤이 들어 있나 봐요. 난 왜 이렇게 골치 아픈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가끔은 들기도 해요. 내가 한결같은 앤이라면 훨씬 더 편하겠지만 재미는 절반밖에 안 될 거예요.
* 무언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즐거움의 절반이 있는 거예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다리는 기쁨이란 건 온전히 나만의 것이니까.
G: 이번 Netflix 드라마도 그렇지만 1백 수십년 전 캐나다 시골마을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투쟁적이지 않으면서 조용하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 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빅토리아 왕조의 규범이 지배하던 시대에 마을 어른들이 학생들의 주장을 꺾으려 하자 마스크로 입을 가린채 마을회관에 들어와서 "언론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피켓 시위를 벌이는 모습, 또 당당하게 자기가 원하는 상대와 자유연애를 하는 모습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P: 원작 소설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이 1963년 당시 이화여고 교사인 아동문학가 신지식 씨였다고 해요. 그녀 자신이 6.25 피란 통에 어머니를 잃고 한동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헌책방에서 일본어판 빨강머리 앤(赤毛のアン)을 구해서 읽고 자신이 한없는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화여고 주보 '거울'에 연재를 하자마자 독자들의 성원이 빗발쳐 1963년 창조사에서 10권짜리 전집을 출판했다고 합니다.[4]
G: 놀라운 것은 오직 루시 몽고메리의 이 소설 덕분에 캐나다 대서양 연안의 오지에 속하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점이지요.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이라 할까요 일본과 중국,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P: 그 섬에 다녀온 사람 말을 들어보니까 샬롯타운이 제일 큰 도시이고 에이본리에는 실제로 초록색 박공지붕이 있는 농가주택이 있답니다. 앤 셜리, 마릴라로 분장한 사람들이 관광객들을 맞아 같이 사진도 찍고 한다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실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풍경을 그대로 실사(實寫)한 것이라네요. 1979년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이 에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철저한 사전준비와 현지취재를 통해 1900년대 초의 현지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고자 했다는 거죠. 만화영화이니까 대강 상상으로 그릴 수도 있을 텐데 놀라운 '장인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간은 만능해결사
일처리가 빠르진 않네
It's true time cures all.
But its therapy would take
considerable time.
열등감도 사랑으로 바꾼
상상력(想像力)의 연금술
Alchemy of imagination has turned
Her complex into love.
Note
1] 캐나다 CBC 방송에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1908년 원작을 모이라 월리-베케트가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Anne"이란 제목으로 2017년 3월부터 7회에 걸쳐 방영하였다. 고아 앤 셜리는 에이미배쓰 맥널티, 매튜와 마릴라는 R.H. 톰슨, 제럴딘 제임스가 각각 맡았다. 이것을 Netflix가 그해 5월부터 국제적으로 방영했는데 크게 인기를 끌자 2017년 9월에 시즌2, 2018년 9월에 시즌3가 "Anne with an E"라는 제목을 달고 각각 10회분으로 제작 방영되었다. 시즌2와 3에서는 모이라 월리-베케트 이외의 작가들도 각본을 썼으며, 고정 출연진과는 달리 거의 매회 다른 감독이 연출을 담당했다. 시청자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Netflix 측은 시즌4는 없다고 발표했다. 각 시즌별로 에피소드 타이틀은 유명 문학작품의 명구를 인용했다. 예컨대 시즌1 첫회는 샤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나오는 "Your Will Shall Decide Your Destiny"이며, 시즌3 최종회의 타이틀은 매리 셰릴의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The Better Feeling of My Heart"이다. Source: Wikipedia.
2]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루시 몽고메리는 자신의 활발한 상상력, 자연에 대한 열렬한 사랑,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깊고 꾸준한 애착, 허영심과 자만심, 고집까지 ‘앤’에 투영했다. 그러나 현대적 시각으로 본다면 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제인 에어에 나오는 대사 같은 수다를 떨고 있기에 청소년 조울증, 가혹한 노동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진단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출처: 조선일보 [Why] 우울을 이기는 마법의 주문… "앤, 우리 지지 말자" 김현진의 순간 속으로, 2018. 6. 9.
3] 백영옥 에세이,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아르테, 2016. 7.
한편 유튜브에서는 한국어로 더빙된 일본의 원작 애니메이션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에 매튜 아저씨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시고 실명 위기에 처한 마릴라 아주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앤이 대학진학과 장학금을 포기하고 에이본리 모교의 교사로 남는 것으로 끝난다. 앤은 그 자리를 자기에게 양보한 길버트의 우정과 사랑을 확인하고, 비록 굽은길이지만 모퉁이를 돌자 주변에 새로운 꽃나무도 보이고 사람들의 속깊은 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몽고메리의 원작소설에 따른 결말이지만, 'Netflix판 앤'이 얼마나 현대적으로 각색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4] '빨강머리 앤의 어머니'로 불리는 번역가이자 원로 작가인 신지식 선생이 2020년 3월 12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소설가 김 훈 씨는 조사를 통해 1960년대 "(우리 세대는) 신지식의 소설 '하얀길', 그녀가 번역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 '빨강머리 앤'을 읽으며 슬품의 힘으로 슬품을 위로 받았다"고 밝히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조선일보, "[발자취] 집 없고 부모 잃은 아이들의 안식처… 한국 '빨강머리 앤'의 어머니 먼 길로 원로 아동문학가 신지식 별세… 1963년 '앤' 국내 첫 번역 소개", 2020.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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