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실과 픽션의 차이: 교섭(2023)

Whitman Park 2023. 1. 25. 21:30

설 연휴 기간 중에 영화 <교섭>을 보았다.

식구들 사이에 무슨 영화를 볼지 설왕설래가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다 아는데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황정민과 현빈 게다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애드립의 명수로 소문난 강기영의 연기대결이 볼 만하지 않겠느냐, 한국 영화 사상 처음인 요르단 로케이션(헐리우드 영화에선 <인디애나 존스>, <마션> 등 사례가 많다)이라니 궁금하다는 등 의견이 엇갈렸다. 결론은 임례순 감독이 어찌보면 뻔한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신묘한 연출로 관객몰이(손익분기점은 350만명)를 할지 직접 확인해보기로 하고 영화관으로 갔다.

 

우선 영화의 무대인 아프가니스탄(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는 월터 미티가 아프가니스탄과 히말라야 산지를 찾아간다)과 지형과 인물이 흡사한 요르단에서 촬영을 한 것이 볼거리였다. 여성 감독이 연출을 했음에도 멜로적 요소는 모조리 배제하고 두 주인공, 외교부 정재호 실장(황정민 분), 국가정보원 박대식 요원(현빈 분) 외에 아프간 현지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한국인 통역(강기영 분) 등 톱스타를 기용하여 만든 것도 성공적이라 할 만했다. 이라크에서 한국인 인질이 참수당하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이었던 국정원 요원 현빈은 다신 그러한 실책을 범하지 않으려 다짐하고 또 다짐한 터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인질 구조를 둘러싸고 의견차이를 보이면서 주먹다짐도 불사하는 듯하다가 나중에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브로맨스' 장면은 관객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또 현빈이 오토바이를 타고 사기꾼 테러리스트를 맹추격하는 장면도 톰 크로즈의 <미션 임파서블> 못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같은 곱씹어볼 만한 명대사도 여럿 등장했다.

 

당시의 언론보도를 토대로 실제 일어난 사건을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서 영화의 줄거리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은 스포일러가 들어있는 영화의 줄거리는 건너뛰시기 바란다.

 

 

영화의 줄거리

 

2007년 7월 13일 배형규 목사와 분당 샘물교회 교인 19명이 아프가니스탄에 단기선교(outreach) 목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베이징과 두바이를 거쳐 그 이튿날 카불에 도착한 아웃리치 그룹은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선교사 3명과 함께 총 23명이 현지 주민들에게 의료 봉사도 하고 의약품과 생필품을 나눠주는 등 드러나지 않게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7월 22일 출국하여 23일에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7월 19일 카불에서 그 다음 목적지인 칸다하르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일행 23명은 카라바그 지역을 장악한 반군 탈레반에 의해 인질로 붙잡혔다.

7월 20일 탈레반은 한국인 23명을 납치하여 억류 중이라는 사실을 공표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비전투 대민봉사활동을 벌이던 한국군이 즉각 철수할 것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수감 중인 탈레반 죄수들을 전원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7월 22일 한국 정부 대책반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도착했다. 정부 당국에서는 인질로 붙잡힌 사람들이 모두 같은 교회 소속이라는 것과 단기선교 활동을 하러 떠난 것임을 파악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오로지 대민봉사 활동을 하러 간 것임을 강조했다.

정부 대책반에서는 탈레반 수뇌부의 의사결정보다 아프간 부족장 회의가 더 효과적임을 알고 실무자(황정민과 현빈)가 통역(강기영)을 대동하고 스마트폰 등 호감을 살 수 있는 선물을 준비하여 유력 부족장을 찾아간다. 그네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인질 문제의 해결을 낙관하던 순간 사태가 급변한다.  일부 국내 언론에서 피랍 인질들이 단기선교의 목적으로 간 것임을 여과 없이 보도ㆍ논평했고 이것을 알자지라 방송이 액면 그대로 보도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의 입장이 180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부족장 회의를 찾아간 실무자들은 일순 못믿을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때까지 협상을 하루하루 연장하던 탈레반은 25일 협상이 결렬됐음을 선언하고 인질 중 남자 1명을 살해했다. 26일 피살된 사람은 배형규 목사임이 드러났다. 협상을 연장하던 탈레반은 30일 심성민 씨도 살해했다. 그러는 사이에 다급해진 정부 대책반은 배상금이라도 지불하고 인질을 구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낌새를 눈치챈 탈레반의 연락담당이라는 정체불명의 영국인이 자기에게 돈을 갖다 주면 아프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인질을 풀어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정부 실무자가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사기를 친 것임을 알아차린다. 그들이 탈취하다시피 가져간 달러 뭉치를 현빈이 오토바이를 타고 맹령히 추격한 끝에 되찾는데 가까스로 성공한다. 

 

* 현지어 통역 카심 역의 강기영은 능청스러운 연기도 아주 볼 만했다.

 

8월 7일 외교통상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자제국가에서 여행금지국가로 한 단계 높였다. 외교부장관까지 아프가니스탄에 날아와 아프간 정부, 미군과 공동으로 인질 구출 및 탈레반 소탕작전을 전개하기로 한다. 이에 반대하던 외교부 실무자(황정민)는 장관으로부터 귀국명령을 받고 짐을 꾸리다가 대통령실에 간청하여 승인을 받고 탈레반과 대면 협상을 시작한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행동을 먼저 보이라고 요구한 끝에 13일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여성인질 2명이 석방되었다

 

현지 미군 전폭기가 탈레반 거점지역을 맹폭하는 등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8월 28일 아프간 현지 언론을 통해 낭보가 전해졌다. 정부 대표단과 탈레반의 협상이 타결되어 남은 19명의 한국인 인질을 전원 석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와 탈레반은 아프간 파견 한국군의 연내 철수와 아프가니스탄에 개신교 선교단의 파견을 중지한다는 등 5개 항에 합의했다.
8월 29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중재 하에 인질 12명이 석방됐고 30일에는 남은 7명이 마저 석방됐다. 먼저 석방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19명은 9월 2일 인천공항을 통해 무사히 귀국했다.

 

감상의 포인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영화는 실화(true story)를 토대로 하고 있다.

하지만 탈레반과의 교섭을 벌인 당사자들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왔듯이 비밀유지(confidentiality) 서약을 하였기에 그들이 사건의 전말을 발설했을 리 없다.

당시의 사건 보도나 참가자의 진술을 토대로 시나리오 작가가 최대한 리얼하게 그리면서도 극적인 장면을 의도적으로 가공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만큼 본 영화 시작 전에 실제 인물과 비슷하더라고 어디까지나 허구(虛構)임을 밝히고(disclaimer)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더라도 여기에 픽션을 가미하는 것은 제작자와 감독의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에 속하는 영역이므로 악의가 없는 한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부문이 픽션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의 협상 사례로서 사실에 입각한 기록은 남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사례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J.F.K.>(1991)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텍사스주 연방검사 짐 개리슨(캐빈 코스트너 분)에게 "왜 대통령을 죽이려 했을까"하는 암살의 목적 내지 이유를 일깨워주고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미스터 X(도날드 서덜랜드 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마치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워싱턴포스트의 두 기자에게 내밀한 정보를 제공하던 Deep Throat와 같은 설정이다. 그는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이지만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올리버 스톤 감독이 허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외교부의 정재호 실장이나 국정원의 박대식 요원이 실존인물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 명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이 현지에 가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언론에 사진까지 나오는 바람에 보안수칙 위반(신동아 699호, 2017.11.)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법적인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국가는 테러리스트나 그 단체와는 협상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있는가 하는 것과 인질석방을 위해 돈(ransom)을 지불하는 것이 과연 금기시되는가 하는 것이다. 인질이 스무 명이 넘는 민간인(종교인 포함)이라는 것도 특수한 케이스였거니와 그들의 석방을 위해 이 두 가지를 모두 어겼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엔딩 부분에 잠깐 나오지만 한국의 선박이 아프리카 연안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잡힌 사건이 잇달아 벌어졌고 나이지리아에서 현지 건설공사를 수행하던 한국 건설사 직원들이 반군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빈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 정부가 국제 테러단체에 만만한 호구(虎口, pushover)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었던 셈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공공기관이나 기업, 주요 인사는 북한 특수부대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최근 들어 북측의 외화벌이 수단이 다변화됨에 따라 사이버 공간에서의 해킹이나 랜섬웨어 공작은 날로 가열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 점에 주목하고 2016년 3월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테러방지법)을 서둘러 제정한 바 있다.

정부 차원에서의 테러리스트나 그 단체와의 협상은 금기시되기 때문에 영화의 제목도 인질구출 '협상'(negotiation)이 아니라 '교섭'(contact point)이라고 용어를 순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 두 사나이의 브로맨스가 두터워지는 계기를 보여준 한 장면이다.

 

정부가 테러단체와 교섭에 임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릴 수 없다는 점에 비추어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들 인질을 구조하는데 정부가 많은 인력과 장비, 비용을 쓴 만큼 정부가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일정 부분은 원인을 야기한 인질이나 그 소속단체에 비용을 청구(구상권 행사)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거론된다.

이 영화에서도 구조된 인질을 항공편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분산해서 귀국시킨다고 했다가 사태가 커지자 전원을 항공기 일등석에 태워 데려오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 것으로 나온다. 현행 테러방지법에서는 여권법상 외교부장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문 및 체류가 금지된 국가 또는 지역을 방문ㆍ체류한 사람에 대해서는 국가가 치료 및 피해복구를 위한 비용을 지원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동법 제15조 2항 단서).

이와 반대로 인질 중 피살자의 유족이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국민의 생명권 보호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3억5천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1년 외교부가 아프간 여행자제 권고를 하였으며 현지에 정부 대책반을 급파하여 피랍자 석방을 위해 상당하고 적절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인정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2010가합77120)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가입이 시급히 요청되는 국제협약이 있다. 유럽회의(Council of Europe)에서 테러단체의 사이버범죄에 대항하여 국가간의 관련법제의 조화를 도모하고 수사기법과 정보의 교류, 수사 및 처벌에 있어서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부다페스트 협약(Budapest Convention 또는 Convention on Cybercrime)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련기관 간의 견해 차이로 그 가입이 미뤄져 왔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제테러단체의 활동이 이미 한 나라가 대응하기에는 그 규모와 세력이 너무 커졌다는 점, 또 북한 특수부대의 암약이 전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 정부의 정보보안 의지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못 미친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도 국제적인 사이버범죄 대응체제에서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