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파이 액션 영화 <헌트> (2022)

Whitman Park 2022. 9. 6. 10:10

추석에 앞서 극장에 가서 딱히 볼만한 영화가 없었다. 그래서 단지 평판이 좋은 화제작이라는 점에 끌려 이정재 감독 데뷔작 <헌트>를 보았다. 집에서 VOD로 보지 않고 영과관에서 큰 화면으로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이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1]이라면 시나리오는 "남산"이라는 제목으로 7년 전에 나왔으나 감독과 제작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는 것, 배우 이정재가 영화화 판권을 사서 각색을 한 끝에 직접 메가폰을 잡고 친구 정우성을 끌어들여 함께 주연을 맡아 만들었다[2]는 것 정도였다.

 

<오징어 게임>의 스타가 만든 이 영화는 예상 밖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개봉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칸에 이어서 캐나다 토론토와 스페인 시체스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로부터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2시간여에 걸친, 우리의 굴곡 많은 현대사를 다룬 스파이 액션 영화로서 합격점을 줄 만했다.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입증되었다시피 이젠 우리 영화도 상당한 수준에 올랐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의 줄거리

개봉 초기인 만큼 영화의 줄거리 소개는 생략하고 이 영화에서 다뤄진 우리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영화는 시작하기 전에 1980년대 초반에 남산(중앙정보부,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시간ㆍ장소를 달리하여 1983년에 일어난 것으로 각색한 허구임을  밝히고 있다.

 

안기부 해외담당 차장 박평호(이정재)와 국내담당 차장 김정두(정우성)는 미국을 방문한 대통령을 수행 중이다. 이들은 10.26 사건 후 중정 직원 박평호[3]를 취조한 특전사 장교 김정두로서 악연을 맺었지만 지금은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김정두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공수부대 소령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하여 '전쟁기계'가 아닌 '생각 많은 육군장교'로서 의식을 갖게 된 남 모르는 사연이 있다.

호텔 밖에서 수십 명의 교포들이 '광주학살의 원흉' 같은 격렬한 어조로 항의 시위를 벌일 때 두 사람은 미 CIA가 감청을 한 첩보를 접하고 재빨리 행동을 개시한다.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정체 불명의 암살단이 인근 극장에 잠입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 소장은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진압하고 그해 통일주체국민회의(이른바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81년 2월 미국을 방문했다. 친정부 교포단체에서 버스를 동원하여 숙소인 블레어 하우스 앞에서 환영집회를 열었으나 인근 라파이예트 공원에서도 200여 명의 한인교포들이 항의 반대 시위를 벌였다. 2차 방미는 1985년 4월에 있었는데 교포사회가 환영하는 쪽과 규탄하는 쪽으로 갈려 소란스럽기는 했으나 암살 기도 같은 것은 없었다.

 

영화에서는 1983년 북한과 일본이 식민지배하의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도쿄에서 비밀리에 협상을 벌일 때 북한 대표단의 한 사람이 가족을 데리고 망명할 의사를 전해 왔다면서 박평호 차장이 직접 작전을 수행한다.

실제로 북한과 일본은 여러 차례 협상을 벌였음에도 교전국간에 적용되는 배상청구권을 요구하는 북한과  북·일간에 교전상태는 없었다며 이를 거부하는 일본의 입장차로 인해 큰 진전은 없었다. 오히려 일본 측은 납북 일본인의 안부 확인과 송환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어 고이즈미 총리의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의 평양방문에도 불구하고 별 성과가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1983년 2월 북한 조종사 이웅평 상위(남한의 대위 계급)가 MIG-19기를 몰고 귀순했다. 이 때 전국적으로 실제상황의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그러나 이웅평 조종사가 삼양라면 봉지를 보고 귀순을 결심했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이 새로 바꾼 암호체계까지 들고 와서 북측 스파이 색출에 이를 동원했다는 것은 영화적인 상상이다.

 

* 실제로는 강원도 고성에서 촬영한 태국 방콕 국립묘지 방문 장면

 

영화의 마지막에 대통령 순방 중인 태국 방콕에서 대통령 암살 음모가 있었고, 동기나 배경은 달라도 목적이 같은 두 주인공이 격돌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1983년 10월 미얀마 양곤의 아웅 산 묘역에서 북에서 파견한 공작원이 원격으로 폭발물을 터트려 이범석 외무장관, 김재익 경제수석을 비롯한 남측 고위인사 17명이 사망한 사건과 오버랩된다. 대통령이 탄 차량이 현장에 2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나 영화 속의 '대통령 제거' 작전은 혼란의 와중에서도 그대로 진행된다.

 

끝으로 코로나 방역으로 인해 해외 촬영을 위한 비자를 받을 수가 없어서 영화의 로케이션은 모두 서울 여의도, 부산, 고성 등지의 국내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1]

이와 같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1983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픽션이면서도 상당히 리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상의 포인트

125분의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처음 든 생각은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는 '두더지(영화 속 '동림'같은 고정간첩)'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우려였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최근 들어 북측 사이버 전사의 해킹이나 랜섬웨어 협박 외에는 간첩단 검거의 소식이 거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1974년 신동방정책으로 유명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 그의 보좌관 군터 귀욤의 간첩 행위로 실각하고, 그로부터 몇 년 후에는 서독과 NATO의 기밀을 동독으로 빼돌린 루체(Lutze) 간첩단 사건이 적발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동독이 붕괴된 후 동독 비밀경찰(Stasi)의 서독내 비밀정보원 자료는 영구 봉인되었다고 한다. 또 구 소련의 한 위성국(라트비아)에서는 KGB가 비밀서류가방을 놓고가는 바람에 그 공개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일도 있었다.

 

과연 우리나라는 북한 스파이 청정국가인가? 현실은 정반대일 것 같다. 과거 평양을 방문한 모모 인사들 중에는 북한 정보당국의 미인계에 넘어가 북에 협조하게 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현 집권여당에서는 2018년 판문점 도보다리 산책로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네준 usb 안에 국가기밀 원자력발전소 건설 자료가 들어있었다고 의심하고 있다. 또 문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 중국, 일본 등 해외로 수조원의 자금이 유출되었던 정황이 드러났다. 더욱이 신임 법무장관이 가상화폐 돈세탁 규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급히 미국에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일부 사회단체의 주요 대중집회, 행사 때마다 북한 찬양 글과 사진이 등장한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우리나라 각계각층에 고정간첩이 수만 명 암약하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을 가짜 뉴스로 치부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 북한의 망명신청자를 데려오기 위한 도쿄 시가지에서 남북 정보요원 간의 총격 장면

 

한편 영화가 너무 실감나게 묘사해도 종종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말에 수긍이 갔다.

영화 <판도라>를 보고 전임 대통령은 원전에서는 반드시 사고가 일어난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탈원전 정책을 펴게 되었다는 말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실제로 다큐영화 <다이빙벨>은 과학적 근거 없음이 밝혀졌음에도 많은 시민과 사회단체 인사들의 세월호 사건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는 말도 있었다.

이 영화에서 수사기관에서 원하는 진술을 얻기 위해 고문과 같은 가혹행위를 자행하는 장면은 지금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아무튼 이 영화처럼 "총소리만 들리지 않는다 뿐이지 비슷한 상황이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지 않나" 걱정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이 영화를 잘 만들었기 때문이라면 다행한 일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속편이 기대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이 암전(暗轉)된 가운데 울린 여러 발의 총성이 그러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뉴밀레니엄 이후 우리 사회에선 얼마나 극적인 사건이 많았는지 꼽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헌트>의 배경을 굳이 남북이 대결하는 스파이 전쟁에 국한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아주 드러매틱했던 국제공사의 수주전, 크로스보더 M&A, UN 무대의 외교전 등 그 소재가 될 만한 사건이 나라 안팎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식겁할 제목을 붙인 이 영화가 흥행이 잘 된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Note

1] 이혜운, "’오징어게임’ 이어 영화 ‘헌트’도 흥행, 감독으로도 인정받은 배우 이정재",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2022.9.3. 

 

2] 영화 <헌트>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힌트는 카메오로 출연한 황정민, 이성민, 유재명, 박성웅, 김남길, 주지훈 등을 찾아보는 재미이다. 이정재, 정우성, 사나이 픽처스 한재덕 대표와의 친분으로 우정 출연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제작비 절감에 기여했겠지만, 이정재와 정우성 두 사람과 함께 스크린에 나온다는 것도 선배 동료 배우로서 기념할 만한 일일 것 같다.

 

3] 중정 차장 '박평호'라 했을 때 뇌리를 스친 비슷한 이름의 중정 직원이 떠올랐다. 10.26 사건 때 김재규 부장을 수행했던 '박선호' 의전과장이었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자기 혼자 박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을 죽인 것이라고 진술했지만, 박선호는 끝까지 부장님과 함께 행동했다고 말하고 상관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선호는 김재규 부장과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은 이래 "국가를 생각할 때 벌레의 눈이 아닌 독수리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었다"고 말해 '진짜 사나이'의 의리와 본을 보여줬다.

<헌트>는 100% 허구임을 밝혔지만, 만일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가 본인이나 유족이 볼 때 사실과 다른 불만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면 법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길까?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필자는 이 행사를 후원한 영산대학교의 해운대 학술세미나에서 "실존 인물의 모델화와 인격권 보호"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한 적이 있다. 그때 VIP 대접을 받으며 김해공항에서 부산 해운대로 직행, 세미나에 참석하는 외에도 여러 극장에서 영화제 출품작을 마음껏 관람하는 특권을 누렸었다.

영산대학교, [영산법률논총], 2006.12.에 수록된 위 논문의 전문은 별첨 참조.

Reallife_story_personality.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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