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로마와 베네치아, 밀라노는 여러 번 가보았다. 그때마다 피렌체는 고속열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잠깐씩 보는 것에 그쳤다.
물론 피렌체도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순위였다. 그러나 토스카나(영어 Tuscany) 지방을 포함해 플로렌스(영어식 표기 '꽃의 도시')를 꽃피는 계절에 여러 날 돌아다닐 작정을 했기 때문에 여태껏 그 꿈이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대신 여행기나 소설, 영화 속에선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가보았다.[1] "All or nothing"이라고나 할까~.
드디어 2024년 5월 피렌체와 시에나를 제대로 찾아가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즈막한 구릉 사이로 사이프러스 가로숫길이 나 있는 토스카나 지방은 제한된 일정 때문에 버스를 타고 주마간산으로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통풍이 재발하는 바람에 절뚝거리며 걷는 길이어서 좀더 많이 보고 오지 못한 게 아쉬웠다.
최근 라디오를 청취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해도 정식으로 들어본 적은 별로 없는 곡 말이다. 마침 그 곡의 내용이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정식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연인의 애타는 마음을 묘사하고 있었다.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과의 법정으로까지 비화됐던 로맨스는 물론 슈만 내외가 발굴한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6)가 그녀에게 바친 순애보적 사랑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녀가 남편에게서 헌정을 받았거나 스스로 작곡한 사랑의 가곡도 많이 알려져 있다.
마침 KBS 1FM에서 송영훈 첼리스트가 클라라 슈만의 세 편의 로망스 리트(Lied)를 차례로 소개하는 것을 성악곡과 더불어 들을 기회가 있었다.[2] 진행자가 독일어 가사를 우리말로 옮겨 낭송해 주었는데 어떤 기시감(deja vu) 같은 게 느껴졌다. 며칠 전 여러 번 들었던 허림 작시, 윤학준 작곡의 가곡 '마중'과 가사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클라라 슈만의 리트는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내 눈빛이 말해주고 있는데 왜 다른 사람에 물어보려고 하느냐는 핀잔 섞인 사랑의 고백이다. 반면 우리 가곡 '마중'은 이 감정을 그리움이라고 하면서 정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대가 사랑이라고 하는 감정이 너무 멀어서 아직 느낄 수 없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 꽃처럼 서 있겠노라고 수줍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3]
오래 전에 KoreanLII 백과사전의 항목으로 한국인이 말하는 '그리움(Longing)'이라는 정서를 설명하면서 허림의 '마중'을 영어로 번역하여 함께 소개한 적이 있었다. 클라라 슈만의 사랑 가곡을 들을 때 그 당시 한 줄 한 줄 영어로 번역할 때의 느낌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마중 허림 시 윤학준 작곡
Going Out to Meet You by Heo rim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If love is too distant to come,
That's okay, I'll go there.
This evening I'm longing for your words.
I want to see you face to face.
Then I'll listen to your dream, and
tell you my love story.
Longing for you means
the fragrance lost long time ago, I think.
I'm pleased to say what the life is.
It's my promise to stand as a flower
waiting for you by myself
when I want to see you.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꽃으로 서 있을게
Longing for you means
the fragrance lost long time ago, I think.
I'm pleased to say what the life is.
It's my promise to stand as a flower
waiting for you by myself
when I want to see you.
I'll stand as a flower.
* 하무뭇하다 = 흐뭇하다, 만족스럽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고속열차를 타고 피렌체 도시를 스쳐 지나가듯 구경했던 것처럼 라디오 방송에서는 1회성으로 끝나버린 점이었다. 그래서 작곡 시기, 원시(原詩)를 쓴 시인, 가사의 내용 등 정확한 정보를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요즘 라디오 방송은 다시듣기가 안 되는 탓이다.
마침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클라라 슈만의 '사랑의 가곡'에 대해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단편적으로 검색하기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검색엔진 Bing을 통해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새Bing - AI 기반 Copilot에서도 대화체로 검색을 하면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4.0과 함께 아주 자세하게 자연어로 답변을 해준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질문과 Bing Copilot의 답변 내용은 다음과 같다.
Q 클라라 슈만이 가곡 "왜 다른이에게 묻고 있어요?"를 작곡한 것은 언제 어디서였나요? 무슨 동기로 누구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인가요? 이 예술가곡은 어떤 의미로 많이 불려지고 있나요? 이 곡을 제일 잘 부른 성악가의 음반을 소개해주세요.
A 클라라 슈만이 작곡한 가곡 '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려고 하나요?'(Warum willst du andre fragen?)는 19세기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ückert)의 시에 작곡된 곡입니다①. 이 곡은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이 함께 작업한 Rückert Lieder 앨범에 수록되어 있습니다①. 이 곡은 '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려고 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①. 이 곡은 클라라 슈만이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하기 전에 작곡한 것으로, 그녀의 첫 번째 가곡 중 하나입니다②.
이 곡을 제일 잘 부른 성악가의 음반을 소개해드리기 위해서는 어떤 성악가를 선호하시는지 알려주시면 더욱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ing Copilot가 제시한 참고 ①에서는 영국 옥스포드 출판국의 웹사이트에서 원시와 영역시를 찾아볼 수 있었다.
AI 번역기 DeepL에게 독일어로 된 원시를 한글로 번역을 시켰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일단 DeepL과 옥스포드 영역본을 참고해 가며 내가 직접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4]
Warum willst du andre fragen? - Friedrich Rückert
Warum willst du and’re fragen,
Die’s nicht meinen treu mit dir?
Glaube nicht, als was dir sagen
Diese beiden Augen hier!
Glaube nicht den fremden Leuten,
Glaube nicht dem eignen Wahn;
Nicht mein Tun auch sollst du deuten,
Sondern sieh die Augen an!
Schweigt die Lippe deinen Fragen,
Oder zeugt sie gegen mich?
Was auch meine Lippen sagen,
Sieh mein Aug’, ich liebe dich!
Why do you want to ask others? - Translated by DeepL
Why do you want to ask others,
Who do not mean it faithfully with you?
Believe not, than what you say
These two eyes here!
Do not believe the strange people,
Believe not thine own delusion;
You shall not interpret my doings,
But look at the eyes!
Is the lip silent to your questions,
Or does it testify against me?
Whatever my lips may say,
Behold my eyes, I love thee!
왜 다른이에게 물어보려고 해요? - 프리드리히 뤼케르트
왜 다른이에게 물어보려고 해요?
누가 그대에게 미덥지 못한가요?
여기 이 두 눈이
그대에게 말하는 것만 믿으세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믿지 말아요
이상한 헛된 것도 믿지 말아요
내 행동을 굳이 해석하러 들지 말아요
그 대신 이 두 눈을 보세요
내 입술이 그대의 질문에 침묵하고
내 뜻에 반해서 말하던가요?
내 입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든
내 눈을 보세요;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고
사랑과 슬픔, 그리움 같은 정서, 창의성, ·····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영역은 제아무리 인공지능(AI) 첨단기술이 발달해도 넘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주신 사람의 영역
첨단 기술도
불가침
Whatever new technology
can't conquer
the old human domain.
Note
1] 피렌체를 무대로 하는 소설과 영화는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가 있고, 단테와 마키아벨리도 피렌체에서 활동을 했기에 여러 지명이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토스카나를 무대로 한 영화는 다이안 레인이 주연한 <투스카니의 태양>(Under the Tuscan Sun, 2003), 액션스타 리암 니슨이 다정다감한 화가 역을 맡은 <Made in Italy>(2020)가 유명하다. tvN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2022)에서도 압권은 토스카나 전원에서 캠핑을 할 때 유해진 배우가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장면이었다. 《토스카나 -김영주의 머무는 여행》(2007)은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닌 오래 머물러야 "Slow is Beautiful"하다는 여행기로서 화제를 모았다.
2] Clara Schumann - 3 Lieder (Art Songs), Op. 12 for voice and piano text by Friedrich Rückert
마침 YouTube에서 클라라 슈만의 가곡 동영상을 찾을 수 있었다.
- "Er ist gekommen in sturm und regen", Barbara Bonney, soprano Vladimir Ashkenazy, piano
- "Liebst du um schönheit" ditto
- Warum willst du and're fragen" Anne Sofie von Otter, mezzo-soprano Hélène Grimaud, piano
Translations by Richard Stokes, author of The Book of Lieder (Faber, 2005).
3] 두 편의 시는 모두 '썸'을 타는 두 남녀 사이를 묘사하고 있다.
뤼케르트의 시에서 애타는 여성은 (내숭을 떨어) 겉으로는 무관심하고 행동거지도 반대로 하지만 나의 눈빛은 그대를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며 당차게 고백을 한다. 반면 우리의 서정시인 하림은 좀처럼 마음을 표시하지 않는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면서 내가 먼저 다가서서 꽃처럼 기다리겠노라고 수줍게 말한다. 동서양의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4] Bing이 주①에서 알려준 것처럼 옥스포드 사이트에 들어가면 뤼케르트의 원시와 리처드 스토크스(Richard Stokes)의 영역 시 "Why enquire of others"를 찾아볼 수 있다. 주 ② 이하는 한글 위키백과사전(ko.wikipedia.org), 네이버 블로그, 월간지 객석(auditorium.kr) 사이트 등을 출처로 밝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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