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벚꽃 나무 아래: 고성현 노래

Whitman Park 2023. 3. 30. 22:20

 

2023년 봄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 등 시차를 두고 개화하던 봄꽃들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피었다.

2월과 3월의 평균기온이 예년보다 높아 전국적으로 봄이 2주일 정도 빨리 온 것이라 한다.

꿀벌들이 채비도 하기 전에 꽃들이 피어버려 양봉농가에도 비상이 걸렸다.

 

서울 도처에 벚꽃이 만발했다가 비라도 오는 날이면,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어 비가 어서 흠뻑 내려야 하건만, 큰일이다.

비바람이라도 치면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버릴 텐데 ······.

가는 봄이 아쉬워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게 생겼다.

 

* 서울 양재천변의 벚꽃길

 

그런데 마침 김상문 친구가 계절에 맞는 시를 노래와 함께 그의 블로그 '한사람 시와 마음'에 올렸음을 전했다.

김동현의 시에 이원주가 곡을 붙인 "벚꽃 나무 아래" 가곡을 바리톤 고성현의 독창, 송지원ㆍ김선덕 바리톤과 소프라노의 이중창, 관악구립여성합창단의 합창곡 여러 버전으로 소개해 놓은 것이었다.

 

해마다 벚꽃이 필 때면 이기철 시인의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을 되뇌이거나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을 따라 부르곤 했다. 며칠 안에 꽃비가 되어 흩날릴 벚꽃을 미리 아쉬워하고 또 지레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므로 모처럼 꽃을 찾아서 부지런히 꿀을 채취하는 벌떼 잉잉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화사한 벚꽃 그늘에 앉아 마음이 넉넉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빚진 것도 없고,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으니 평정심(平靜心)을 되찾을 수 있었다.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Under the Shade of Cherry Blossom Trees    by Lee Ki-cheol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For a few days in the shade of cherry blossoms,
You're advised to sit down with your heart-beating life left behind.  
Let go of your mind filled with sorrow or longing for someone,
Let it go out of love and hate,
Please sit down being naked by the wind.
From home which is far off from here,
From today when it may be completed by being scattered,
Far away from anxious mind of challenge,
Far away from near-empty bank accounts,
Please sit down cleanly like the shade of cherry blossoms.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Then our life, which has nothing to forgive or not to be forgiven,
Will become generous and fresh
Like cherry blossoms which invite buzzing bees.
If you want your gloomy life to be changed into a joyful song
Like a song of wind passing by cherry blossoms,
Would you come to the shade of cherry blossoms?

 

 

그런데 "벚꽃 나무 아래"는 이전 곡들과는 차원이 다른 노래였다.

봄바람 휘날리면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퍼지는 길을 둘이서 같이 걷자는 게 아니었다.

 

시인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벚나무가 꽃샘바람이 불 때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른다고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 그때마다 꽃잎은 노래에 잠겨 아득히 하늘 가장 깊은 곳으로 날아간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그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 노랫가락이 대기 중에 흐르고 또 흐르면 어떻게 될까?

시인은 벚꽃잎이 세상 가득 하얗게 채워진다고 마음 속으로 그렸다. 꽃잎이 땅에 떨어져 슬픈 게 아니라 온 세상에 꽃잎이 하얗게 채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더 이상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벚꽃나무 아래   - 김동현

Under the Cherry Blossom Tree  by Kim Dong-hyeon

 

하얗게 꽃피운 고운 나무는
더 하얗게 기다리는 저 고운 손보다도 빛나네
그보다 빛나네

A fine tree that blooms white
Shines brighter than those beautiful hands that waits whiter.
It's brighter than that.

수줍게 얼굴 붉힌 벚나무는
나지막이 찬바람 뒤에 숨어서 그대를 노래해
노래해 언제까지나
노래는 바람타고 흘러
꽃잎은 내 노래에 잠기네 곱게 잠겨

The cherry tree that blushed shyly
Hiding behind the cold wind, singing to you
Sings for you forever.
The song flows with the wind;
The petals are drowned in my song, beautifully immersed.

두 눈을 감고 마음을 열면
아득한 저 하늘 가장 깊은 곳
그곳까지 나를 데려가네
부르고 또 불러 흐르고 또 흘러

When I close my eyes and open my heart
In the deepest part of the sky
It's taking me there
I sing and sing and flow and flow.

꽃잎은 세상 가득 하얗게 가득 채워지네
그대 마음에도 내 마음에도
하얗게 더 하얗게 더 가득 날리네

The petals fill the whole world with white
In your heart and in my heart
Blowing whiter and whiter, and flowing fully.

 

* 섬진강변의 벚꽃길. 사진출처: 네이버 푸른안개 블로그

 

이 노래는 종전처럼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불러야 제 맛이 우러난다.[1]

그래서 중후한 음성에 드러매틱한 창법으로 부르는 고성현 교수의 성악곡으로 "벚꽃나무 아래"를 들을 때라야 그 느낌이 충분히 살아나는 것 같다.[2]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아파트 단지 안팎에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나무 아래서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들으면 좋겠다.

"꽃잎은 세상 가득 하얗게 가득 채워지네."

봄이 너무 빨리 왔다고, 꽃들이 피자마자 봄이 지나가버렸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Note

1] 어느때부턴가 연세대 고성현 교수의 가곡을 들을 적에는 그 가사를 영어로 옮겨보는 일이 많았다.

처음엔 얼토당토 않은 노래가사를 공연히 감정과잉으로 부르는구나 싶었는데 열띤 청중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그 무엇이 있다고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스스로도 놀라웠다.

일찍이 추사체의 완성은 완당 선생 말년의 어린아이 글씨 같은 동자체(童字體)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것과 흡사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영어로 한 단어 두 단어 음미하며 한글로 옮기는 것이다.

이번 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성악가가 너무 감정에 치우쳐 노래한다는 반감이 들기도 했는데 그건 내가 김동현 시인의 본뜻을 미처 헤아리기 전이었다.

첫 연의 "더 하얗게 기다리는 저 고운 손보다도 빛나네"는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처음의 '하얗게 기다리는'은 겨울 밤을 하얗게 밝힌 심정을 뜻하고, 중간의 '고운 손'은 새봄을 맞이한 아름다운 마음씨, 그리고 첫 연 끄트머리의 '빛나네'는 방금 피어난 벚꽃이 아침햇살을 받아 화사하게 빛나는 모습을 연상하니 그 이상의 표현이 없겠구나 생각됐다.

마지막 연의 "꽃잎은 세상 가득 하얗게 가득 채워지네"는 더욱 기가 막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잎이 꽃비가 되어 떨어지는 것만 보았기에 비바람이 쳐서 벚꽃이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광경을 보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시인은 설령 꽃샘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흩날리더라도 저 하늘 깊은 곳으로 날아간다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의 상상력은 지구의 중력(重力)마저도 거스를 수 있지 않은가!

 

2] 시 구절의 의미와 시인의 본뜻을 파악했다고 해도 영어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지난 3월부터 내가 운영하는 온라인 영문백과사전 KoreanLII의 번역담당 AI 번역기에 초벌번역을 맡겨 보았다.

Papago, DeepL, Google 번역기 모두 둘째 연의 "나지막이 찬바람 뒤에 숨어서 그대를 노래해"의 주어를 1인칭 ' I '로 처리했다. 물론 원시(原詩)에서 주어가 생략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첫째 연에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듯 겨울을 보낸 벚나무가 새봄을 맞아 피운 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노래부르는 것이므로 주어는 벚나무, 동사는 언제까지나 노래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뒤에 숨어서 그대를 노래해"는 동사 Sings forever에 걸리는 분사구문(分詞構文, participial construction)으로 처리하면 훌륭하게 하나의 문장이 완성되는 셈이다.

마지막 줄 "하얗게 더 하얗게 더 가득 날리네"는 주어가 애매하였다. AI 번역기는 문장을 끊을 필요가 있어서 그랬는지 모두 주어를 'It'라고 했다. 그러나 문맥상 꽃잎이 주어이므로 동사는 세상을 채우는 의미에서 'fill'이고, 하얗게 가득 날린다고 했으니 역시 주어가 꽃잎인 분사구문으로 처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AI 번역기와는 달리 "Blowing whiter and whiter, and flowing fully"라고 운(韻, rhyme)이 맞는 현재분사형 blowing과 flowing을 써서 온 세상에 가득 찬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다.

아직은 시 같이 문법을 도외시(Poetic License)하는 운문(韻文)을 번역하기에는 AI 번역기로서는 무리라 생각되었다. 이런 스타일의 문장을 학습(machine learning)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사람이 개입하고 수정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 우리 시의 영역에 주력하고 있는 나로서는 다행이라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