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 2016)

Whitman Park 2022. 2. 20. 08:30

은퇴를 하고 나니 시간 여유가 있어서 너무나 좋다.

더 이상 시간에 쫒겨 허둥지둥 안 해도 된다는 것은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리라.

그런데 나 자신도 지하철을 공짜로 타면서 낮 시간대 전철 객차 안에 가득한 어르신들을 보면 웬지 민망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뭘 잘 했다고 젊은이들에게 부담을 지우나?"

그래서 식구들이 좋은 영화니 함께 보러가자고 하던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를 싫다고 했다. 노인장이 과수원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과일을 나눠준다는 거지? 

 

어느날 라디오 방송에서 이 영화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두 분 나이를 합쳐서 177세인 츠바타 슈이치-히데코 노부부가 지방 중소도시에서 텃밭을 일구고 살면서 되새기는 말 "차근차근 천천히" 였다. "Slow and Steady"라면 중고등학교 시절에 날마다 복창했던 영어 격언이 아니던가!

지금 8년째 혼자서 꾸려가고 있는 위키피디아식 법률문화 백과사전 KoreanLII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차근차근 천천히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내가 꼭 보아야 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이 영화를 상영하는 이수 아트나인 극장이 집 가까운 데 있었다.

조조할인 티켓을 사서 영화를 보았다. 넓은 객석에 손님이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조용한 가운데 영화를 보고 난 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두 분의 인품이, 서로 존중하고 공대하는 모습이 탐스러운 열매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주인공 할아버지는 도쿄대 건축공학과를 나와 전후 일본주택공단에 들어가 아이치현 고잔시 뉴타운 건설 업무를 맡았다. 그가 당초 계획했던 생태계를 살리는 아파트 단지 건설안이 채택되지 않고 물량공급 위주로 설계안이 확정되었다.

그는 실망하는 대신 단지 외곽에 300평 택지를 분양받아 스스로 생태계 복원을 위해 "차근차근 천천히" 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기로 했다. 도시계획을 하고 건설한 사람들이 그 도시를 떠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공감한 어느 지방 요양병원에서 그에게 설계를 맡기고 그의 구상대로 병원이 세워진 모습을 보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 후 50여년 간 텃밭을 일구며 부부가 화락하며 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침식사도 할아버지는 일본 전통식으로, 할머니는 토스트에 당신이 손수 만든 과일잼을 발라 먹는데 한 번도 다툰적이 없었다. 할아버지 사후에 할머니는 아침마다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밥과 반찬을 영정 앞에 올리고 생전에 잘해주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셨다. 

할머니는 낙엽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고 나무가 차근차근 천천히(こつこつ ゆっくり) 자라면서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할아버지는 이런 할머니를 위해 수십 종의 꽃과 허브, 채소 밭에 다정한 팻말을 세우고 새들이 물 마시고 목욕도 할 수 있는 수반을 정원 한 켠 나무 아래에 설치한다.

어느 날 밭일을 하고 휴식을 취하던 할아버지가 주무시듯 세상을 떠난다. 

 

내친 김에 비슷한 소재의 영화 <타샤 튜더>도 보기로 했다.

경희궁 옆 예술ㆍ독립영화 전용 에무 시네마를 찾아갔다. 에무는 '애무'가 아니라 근대 사상가 에라스무스의 약칭이라고 한다.

현재 상영 중이거나 상영할 영화도 여러 편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Itzhak>, <하나 빼고 완벽한 뉴욕 아파트> (The Boy Downstaris), <일일시호일>("일상이 변하는 차 한 잔의 마법"), <미래의 미라이>(일본 애니메이션), <파격 실화드라마 Lizzie>, <창간호> 등.

 

* 경희궁 옆 예술영화관 에무 시네마

2007년 일본의 제작팀이 버몬트 주에 있는 타샤 튜더 농장을 찾아가 91세의 백발 할머니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그녀의 삶과 일, 자녀와 가족, 정원의 꽃과 나무를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볼 수 있었다.

몇 대째 키우는 웨일즈 지방의 목양견 코기(Welsh Corgi 일견 여우처럼 생겼는데 성격이 온순하고 다리가 짧아 소떼 다리 사이로 다니면서 소몰이하기에 적합)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튜더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우리 인생은 즐거운 일만 하기에도 너무나 짧다"고 했다.

예전처럼 동화책을 쓰고 삽화를 그리지는 않지만 애프터눈 티를 즐기고 손자와 손주며느리가 정원 일 하는 것을 일일이 참견하고 있었다.

사실 30만평이나 되는 농장 4계절 가꾸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이 영화는 꽃 피고 눈 내리는 아름다운 장면만 보여줄 뿐이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과주스 만들고 양초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고될지 상상하고도 남았다.

* 타샤 튜더의 둘째 며느리가 바지런한 한국 여성이어서 더 호감이 갔다. 

 

나로서도 미국 동부에서 살 때 버몬트 주를 여러 번 스쳐지나가기도 했고, 버몬트 주의 단풍과 화강암(워싱턴DC의 워싱턴 기념비를 비롯한 석조건물의 자재로 사용됨)이 좋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고즈녁한 골목길을 걸어나오면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산과 들로 쏘다니는 것도 좋겠지만 집안에 꽃피는 화분을 들여놓거나 관상수를 보고 즐기며, 강아지와 아파트 정원을 산책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일 것 같다.

 

* 사진 왼편에 포터가 살았던 힐탑 집이 보이고 그녀가 가꾸었던 농장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

그리고 현장을 직접 찾아가보면 어떨까?

어디선가 튜더 할머니 (Tasha Tudor, 1915~2008)가 나타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실 것을 기대하며 버몬트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영국에도 그와 비슷한 사연을 지닌 여류 동화작가 베아트릭스 포터 (Beatrix Potter, 1866~1943)가 살았다.

<피터 래빗> 동화의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가 살았던 영국 서북부 호수지방(Lake District)의 윈더미어(Windermere)에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포터 농장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다. 포터 덕분에 사라질 뻔한 옛날 농가와 헛간, 멸종 위기의 허드윅 양 무리가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윈더미어에 있는 4000 에이커(약 490만평)가 넘는 포터 농장은 1943년 그녀의 사후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되었다. 그 후 내셔널 트러스트 명의의 농장은 윈드미어 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나이든다는 건
살아온 햇수만큼
더 멀리 본다는 것
What aging means 
is one can see further 
as much as the years of one's life.
* 나이듦에 대해서는 여기에 더 좋은 시가 있음.

 

* 우리집에서도 동양난과 서양난, 게발선인장 꽃이 함께 피었다.

이수 아트나인에서 <인생 후르츠> 를 보던 날 영화가 끝나고 곧이어 <미스터 스마일>이 상영되는 것을 알았다. 이 영화(The Old Man and the Gun, 원제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패로디한 것?)는 82세가 된 로버트 레드포드의 은퇴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영화관에 온 김에 표를 사갖고 다시 들어가 '나이듦(Aging)'의 맥락에서 내쳐 앉아서 보기로 했다. 

70대 노인 포레스트 터커가 미소를 지으며 은행 창구직원의 현금을 털어간다는 스토리인데 16회에 달하는 그의 탈옥 전력을 보여준 것은 <내일을 향해 쏴라>로 스타덤에 올랐던 로버트 레드포드 자신의 필모그래피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포레스트 같이 철이 부족(?)하지만 레드포드처럼 여자친구를 둔 능력있고 멋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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