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생의 각오라 할까 인생의 행로를 바꿀 만큼 새롭게 결심을 한 장소가 어디 있었던가?
동해의 일출을 지켜보던 어느 해변가? 제주도 산방굴사 앞? 스위스 알프스 산자락의 빙하호? 미국 그랜드 캐년의 전망대? 영어로 번역하면 이런 말이 될 것이다.
"Would you tell me the place where your course of life has shifted?"
8월 말 동해 바다의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똑 같이 푸르지만 수평선 아래는 짙푸르고 가끔 흰 포말을 이고 해변으로 파도가 밀려와 투명해 보이는 하늘과 차이가 날 뿐이었다.
여름의 끝자락, 해수욕장도 문을 닫았고 백사장에는 사람들의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긴 채 갈매기만 몇 마리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파도가 해변가로 밀려왔다가 되돌아가는 규칙적인 움직임만이 정적인 단조로움을 깨트리고 있었다.
자동차를 세워놓고 목도 축이며 바다 풍경을 여유있게 감상할 장소로는 커피숍이 안성맞춤이었다.
고즈녁한 분위기에서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보다 뜨거운 커피나 달콤한 과일 주스가 나을 듯 싶었다.
바깥 테라스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먼 바다를 응시하다가 이내 '멍' 때리는 포즈를 취하게 되었다.
커피숍 실내에서는 흔한 카페 뮤직 BGM도 없었다. 오직 바닷가 미풍을 맞으며 수평선을 바라보고 멍 때리고 앉아 있으면 그만이었다.
극히 정적인 풍경을 대하고 앉아 있으려니 처음엔 온갖 생활소음이 귀를 어지럽히는 듯하다가 점차 지난 여름의 일들, 오늘 했던 일의 리플레이가 끝나자 생각 자체가 지워져버린 것 같은 백지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먼 바다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었다.
.
.
멍 때리기
영원 무한한 것에
내 마음 맡기기
Spacing-out is
to find Endless Eternity
in a restless world.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모처럼 복잡하던 머리도 리셋이 되고 완전한 휴식을 취했다고 느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여운을 간직하기 위해 조용히 차를 타고 커피숍을 떠났다.
.
그런데 By the way,
아뿔싸~ 숙소에 돌아와 보니 귀중품을 넣어둔 백을 그 커피숍 테러스에 놓고 온 게 비로소 생각났다.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커피숍 카운터에 연락하여 백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영수증은 이미 쓰레기통에 버렸고, 카드사 콜센터도 연락이 안되는 주말이었다. 강릉 연곡 해변가의 카페 명단을 스마트폰 앱의 지도에서 찾아보아도 그 커피숍은 눈에 띄지 않았다.
휴대폰 검색 실력을 총동원하여 이리저리 검색해 보았으나 유독 그 커피숍만은 연락처가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새로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선지 업소의 전화번호가 등록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를 돌려 그곳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의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백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자 1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한 시간 여 앉아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 커피숍 드나들었으니 말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낙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깥 테라스의 피크닉 테이블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동선과 떨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서울 시내에서도 커피숍 테이블에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놓고 화장실에 다녀오더라도 무사하다는 SNS 경험담에 일루의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반면 CCTV 카메라가 있더라도 사각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누가 슬쩍 들고 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제자리에 남아 있을 확률은 50% 안쪽, 어떤 사람이 카운터에 맡겨놓았을 가능성은 30%, 분실 가능성이 20% 정도였다. 아무리 가능성은 낮더라도 그 백을 잃어버릴 경우의 카드 분실 신고, 신분증 재발급 등 수습책은 골치 아프기 짝이 없었다. 다행한 일은 모든 데이터가 들어 있는 스마트폰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전화통신 기능보다 카메라 기능이 들어있다는 게 스마트폰의 분실 가능성을 줄여준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졌다.
아무튼 속히 현장에 당도하여 가부 간에 대책을 세우는 일이 시급했다.
정확히 한 시간 만에 커피숍에 도착했다.
스프링에서 튕기듯이 떠날 때의 동선과 반대로 뛰어갔다.
.
"하나님, 감사합니다!"
테라스의 피크닉 테이블 위에는 백이 얌전히 원래의 모습대로 놓여 있었다.
백을 찾아서 들고 카운터로 갔다. 전화 연락처가 없어서 애를 먹었다는 말을 하고 감사의 말만 전할 수는 없었다.
다시 음료를 주문해서 받아 들고 영수증도 고이 접어서 지갑속에 넣고, 진짜로 먼 바다를 바라보며 멍 때릴 작정을 했다.
초조했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고 정말 간만에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면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오늘과 같은 여유를 갖고 살리라 다짐했다.
맨처음 영어로 질문을 했으니 영어로 답을 할 차례이다.
.
"Sure, it's a coffee shop on the East Coast beach near Gangneung.
I was delighted to see my bag containing precious things being kept intact on the table after one hour.
At that time, I made up my mind to keep my mind calm and to be thankful to others aroun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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