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로기완〉(2024)의 우연 같은 필연

Whitman Park 2024. 3. 6. 09:40

Netflix 신작 영화 〈로기완〉(My Name is Loh Kiwan, 2024)을 보았다.

미니 시리즈 드라마 〈태양의 후예〉 이래 송중기의 단정한 모습만 보아온 터라 유럽에서 노숙자가 된, 북한 사투리를 쓰는 탈북 청년의 모습은 어색하고 처음엔 몰라볼 정도였다.

 

* 출처: Netflix 포스터

 

요즘 탈북민의 처지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주목을 받고 있다.

북한의 비참한 인권 현실과 필사적인 탈북과정을 그린 국제적인 화제작  〈비욘드 유토피아〉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반면 〈로기완〉은 조해진의 원작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모티브만 가져온[1] 상당 부분이 픽션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김희진 감독이 각색을 하고 직접 연출을 맡음으로써 원작과는 사뭇 다른 설정이 많이 들어갔다.

최근 들어 백만 관객을 모은 영화  〈건국전쟁〉에서는 다큐 작가가 쓴 자막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해설자가 스토리를 진행한다. 이 영화에서는 글로벌 OTT인 Netflix가 제작을 지원해서인지 EU의 최대 현안으로 대두된 난민 이슈 외에 스포츠 도박과 마약, 총기 사건, 안락사, 또 뜬금 없이 마다가스카르 리조트가 나와 관객들을 다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경마 같이 도박이 허용되는 실내 사격. 출처: Netflix 영화에서 캡쳐

 

감상의 포인트

2시간이 넘는 이 영화가 끝났을 때 탈북민 이야기가 아니라 송중기의 로맨스 영화가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법적인 관점에서의 감상 포인트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주제들이기에 스포일러에 미치지 않는 선에서 다뤄보기로 한다.

 

* 벨기에의 난민 심사 절차

함경도에서 어머니와 함께 탈북한 로기완은 외삼촌이 마련해 준 돈으로 난민 브로커에 의뢰하여 벨기에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브뤼셀 공항에서의 출입국 심사 때 "영어를 못한다"고 말해 난민 (refugee)  지위를 신청하고 일단 벨기에에 입국할 수 있었다. 통역의 도움을 받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인정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난민신청자가 많이 밀려 있어 추운 겨울을 보낸 후에야 벨기에 담당 공무원의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벨기에는 1951년 난민협약(Convention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과 1967년 난민 의정서(1967 Protocol relating to the Status of Refugees) 가입국이기에 로기완이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이라면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 받을 우려가 없으므로 중국으로 추방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로기완은 자신이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여야 했고 평양에 가서 어머니와 찍은, 단 한 장 지갑 속의 사진, 조선족과는 다른 북한 말투를 쓴다는 관계자의 증언을 요하였다. 위변조 서류를 제출하면 아예 심사대상에서 제외되므로 변호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현지 정육공장의 반장이자 숙소의 친절한 이웃이었던 조선족 아줌마는 경제적인 이유로 불법 입국한 신분이었기에 법정에서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줄 수 없었고 그녀는 사실을 실토하고 결국 벨기에에서 추방되고 만다.

 

* 탈북민 지원단체

이 영화를 보면서 탈북 직후에 탈북민을 안전지대로 피신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조직적인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중국 공안의 감시가 날로 엄격해지고 있는 북한-중국 국경지대에서는 이런 활동이 지하에서 은밀하게 행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단체 종사자들이 중국 공안에 붙잡혀 추방 당하거나, 몇 사람은 북한에 끌려가 지금까지도 감옥에 갇혀 있다.

그 다음으로는 중국이나 제3국에서 법적인 문제에 부딪혔을 때 현지 변호사를 연결해주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력을 제공하는 일이라 하겠다. 지금도 여러 인권단체와 선교단체에서 노력하고 있는데 언론이나 소셜미디아에서 다루어졌을 때라야 비로소 도움의 손길이 미치는 실정이다. 

 

* 중국의 장기(human organ) 밀매 현황

이 영화에서는 트럭에 치여죽은 로기완의 어머니 시신을 로기완의 외삼촌이 현지 병원에 해부실습 용으로 팔고 돈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로기완은 그 돈을 난민 브로커에게 주고 서류를 꾸며 벨기에 행 비행기를 타고 올 수 있었다.

이것은 엄연히 불법이기에 벨기에 난민심판 사무소가 중국 현지 병원에 사실 여부를 조회하였을 때 인체장기는 물론 시신까지도 거래대상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벨기에의 안락사(euthanasia) 허용 여부

벨기에는 이웃 나라인 네덜란드[2]와 마찬가지로 2002년 조력 존엄사(aided death with dignity)를 허용하는 입법을 하였다.

다만, 불치병 또는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그의 의사가 명백하고 고통이 심한 경우에 한해 허용하되 반드시 의료진이 엄격한 법적 절차를 걸쳐 실시하도록 했다.

최근에는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 온 93세의 드리스 판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1977~11982 재임)가 70년 해로한 그의 동갑 부인과 함께 안락사를 택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고인이 설립한 시민 단체 ‘권리 포럼’ 측은 가족을 대신해 “두 사람 모두 건강 악화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상대를 남겨두고 먼저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 벨기에에서 총격사건에 휘말린 마리가 황급히 출국하는 공항에서의 이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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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장한 축복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마리(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최성은 扮)가 로기완과 작별하면서 그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제일 잘 한 일은 당신의 지갑을 훔친 것이었어."

일견 마리의 행동은 돈을 아끼느라 공중화장실과 코인 세탁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로기완의 전 재산을 빼앗고 로기완을 일순 절망에 빠뜨린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은 로기완과 마리를 연결해 준 인연의 끈이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었으니, 변장한 축복(Blessing in disguise), 우연이 아닌 필연(not a Coincidence)[3]이라고나 할까?

 

마리는 로기완이 죽은 어머니(맨얼굴의 김성령 분)의 몸값으로 벨기에까지 올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녀 자신과 비교, 반성하게 되었다.

그녀는 불치병에 걸린 엄마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손가락에 줄로 매달아 놓은 초인종 소리를 못들은 척 한적도 있었지 않은가! 그러니 엄마의 안락사를 묵인하고 동조한 아버지를 비난할 수만도 없는 터였다.

결국 그녀가 로기완의 지갑을 찾아주기 위해 스포츠 도박 갱 조직에서 발을 빼고 로기완을 돕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로기완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벨기에에서 거주허가증을 받고 해외 여행도 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공항에서 작별할 때 여행사 포스터를 보고 즉흥적으로 생각했던 바오밥 나무 아래 마다가스카르 해변은 두 연인이 재회하는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Note

1] 원작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는 13년 전 창비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며  2013년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Netflix 영화화를 계기로 2024년 2월 송중기의 얼굴을 표지에 넣은 리마스터판이 발행되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불우한 이웃의 사연을 소개하고 실시간 ARS 후원을 받도록 하는 방송 작가이다. 그가 선한 의도임에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현실에 절망하던 차에 시사잡지에 실린 탈북청년의 사연을 접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벨기에로 떠난다. 그가 남긴 L (로기완의 이니셜)의 일기가 소설의 기둥 줄거리가 되었다. 

 

2] 2000년 11월 28일 네덜란드 하원은 의사에게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허용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안락사는 불치병 또는 말기 증세로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환자를, 본인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고통이 적게 인공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조치를 말한다. 안락사를 인간의 권리로서 인정하고 법으로 명문화한 것은 이번이 세계최초이다.

이날 통과된 법안은 환자가 불치병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고, 다른 의학적 치료법에 대해 환자가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하며, 환자가 이성적인 상태에서 안락사를 꾸준히 자의적으로 요청해야 하는 등의 조건을 달았으며, 대상자는 반드시 법적으로 네덜란드 국민이어야 한다. 안락사는 오래 전부터 네덜란드 전역에서 암암리에 시행돼 왔다. 1999년 한해 동안 보고된 안락사 건수는 2216건에 달했으며, 실제 시행은 5000건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법안은 2001년 4월 10일 네덜란드 상원을 통과한 후 시행되었다. 조선일보, "네덜란드 하원, 세계 최초로 안락사 합법화 법안 의결", 2000.11.28.

 

3] 노숙인 신세의 탈북민 청년에게 이국 땅에서 만난, 같은 말은 쓰지만 도둑질하는 동포 처녀는 어떤 존재일까? 나를 곤경에 빠트린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우여곡절을 겪고 보니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이러한 경우를 놓고 사람들은 흔히 나를 도와주는 귀인(貴人)이 나타난 것이라 말한다. 역리학에서는 이를 '귀인내조(貴人來助)'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A valuable person appears"라기보다 "Someone comes to help me"라 할 수 있다. 귀인은 반드시 유력한 인사가 아니며 이 영화에서처럼 내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나를 괴롭히거나 화나게 하는 사람을 대놓고 미워하지 말아야 함을 보여준다. 오히려 내가 먼저 나서서 악연(惡緣)을 길연 (吉緣) 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