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미스터 트롯' 오디션의 이변(TV조선, 2020)

Whitman Park 2022. 2. 20. 11:40

TV조선의 <미스터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열세 살 초등학생이 우리가 잘 아는 "이 풍진세상"을 너무나 구슬피 불러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위축되어 있던 온 국민을 울린 것이다.

2월 15일자 조선일보는 어릴 때부터 트롯 신동 정동원 군을 키워준 할아버지가 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할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희망가"를 13세 소년이 세상 초연한 듯 천진한 목소리로 슬프게 불렀다고 평했다.

 

* 초등학생 트롯 가수 정동원 군. 사진 출처: 이하 TV조선 캡쳐

 

기본적으로 한국인의 유전체(DNA)에는 근대사의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맺혀 있는 한(恨)이 켜켜이 쌓여 있음에 틀림없다. 기독교 신자라면 다 아는 창세기의 야곱이 겪었던 인생의 신산(辛酸)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세기 47:9) 

 

풍진세상(風塵世上)이란 세상살이가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어렵고 힘들다는 뜻 아닌가?!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하찮게 버려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일제치하: 나라 잃은 피압박 민족의 설움

―  해방 후 좌우 대립과 6.25전쟁의 참화, 전후의 보릿고개와 민생고

―  1960~70년대의 밤낮 없는 경제건설 수출의 첨병

―  1970~80년대의 권위적 정권의 민주화 요구 억압

 

* TV조선의 <미스터 트롯> 2.13 '패밀리가 떴다' 팀의 열창 장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영화상을 석권한 터에 해외에도 이러한 사정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그 가사를 영역하여 필자가 운영하는 Wikipedia식 법률문화 백과사전 KoreanLII에 올렸다.

⇒  KoreanLII "Song of Hope"

 

희망가  - 임학천 

 

이 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Song of Hope  by Im Hak-cheon a.k.a.

 

In this world of troubles, what’s your hope?
Isn’t it enough that you’ve enjoyed wealth and prosperity?
Under the clear sky and the bright moon, I’m mulling over future,
Everything in this world is but a dream.

 

In this world of troubles, what’s your hope?
Isn’t it enough that you’ve enjoyed wealth and prosperity?
Are you satisfied with chatting, wine, women and gambling?
Then, forgetting everything in this world is your hope. Is that enough?

 

* 태권도 트롯 가수 나태주는 노래 사이에 폴댄스를 추기까지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노래는 여러 가지 진기록(珍記錄)을 갖고 있었다.

 

* 1920년대 초 음반으로 취입된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알려졌다.[1] 이 곡은 19922년에 나온 노래집에는 "청년경계가"로 실려 있으며, 일본축음기상회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 원곡은 미국 흑인들이 예배 때 부르던 성가(聖歌)였다.[2] 일본에서는 "夢の外"라는 번안곡으로 널리 알려졌다.

* 일본에서 이 곡은 1910년 '七里ヶ浜の哀歌(시치리가 하마의 애가)',[3]  일명 '眞白き富士の嶺(새하얀 후지산 봉우리)'라는 제목으로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으며 그후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

* 우리나라에서는 맨처음 민요가수 박채선·이류색이 1920년대에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30년 당시 최고 인기 가수이던 채규엽(蔡奎燁)이 "희망가"를 불러 히트한 이래 가사가 조금씩 바뀌어 불렸다. 2절은 "담소화락(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범하여/ 전정(前程) 사업을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반공 중에 둥근 달 아래서 갈 길 모르는 저 청년아/ 부패 사업을 개량토록 인도하소서"로 청년들을 향해 주색잡기에 골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업을 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 1960년대 이후 나온 신카나리아·고복수 등 원로 가수들의 노래는 흘러간 옛 트로트처럼 정통 창법을 고수한다. 1980년대 들어 한대수와 송창식, 이연실, 전인권 등이 선보인 ‘희망가’는 당시 청년들의 속마음을 대변한다.

* 이 곡은 최근까지도 김종서, 시나위, 최영철, 장사익, 한대수 등의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음반으로 발표했다. 그 밖에도 가슴 뻥 뚫리는 성량의 이선희가 부르는 맑은 ‘희망가’, 기타 반주와 거친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안치환의 ‘희망가’도 있다. 팝페라 테너 임형주는 20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디지털 싱글로 이 노래를 녹음했다.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 대금 명인 이생강의 ‘희망가’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새마을연수원에 강제 입소해 5공화국의 이념교육을 받던 언론인들이 언론의 자유를 빼앗긴 세태를 한탄하며 즐겨 불렀던 노래로 화제를 모았다. (오소운 목사)

* 일제 강제징용자들의 실상을 고발한 논픽션 영화 "군함도 (The Battleship Island, 2017)"의 엔딩곡으로 불려져 관객들에게 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 2020년 1월 퀸 엘리자베스 2011콩쿠르에서 우승한 소프라노 홍혜란이 부친의 애창곡 "희망가"를 포함한 한국 가곡 음반을 테너 최원희와 공동으로 발표했다.[4]

* 2020년 2월 TV조선의 오디션 프로에서 4명의 가수(고재근, 김호중, 이찬원, 정동원)가 '패밀리가 떴다'라는  팀을 이루어 이어 부른 곡으로 전국적으로 28%가 넘는 시청율을 기록했다

⇒ TV조선의 <미스터 트롯> 2.13 '패밀리가 떴다' 팀의 열창 장면

 

짧은 노래일 망정
어떻게 하면 청중의 심금을 울릴까?
누구는 봉춤을 추고 누구는 구슬픈 노래를 부르네

Note

1] 최유진,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이부터 방탄소년단까지", Korea in Records, 국가기록원 블로그.

 

2] 19세기에 미국에서 불리던 가스펠 송(靈歌)을 수집하던 제레미아 인갈스(Ingalls)가 1830년대에 펴낸 남부 흑인들의 찬송가 악보집에 '희망가'의 원곡이 들어 있다. "The Lord into His Garden Comes"라는 제목의 찬송가다. 1890년대에 일본에서 먼저 번안곡이 나왔고, 우리나라에는 1910년대에 흘러들어와 기독교 신자 임학천이 "이 풍진 세월"이라는 제목으로 1·2절 노랫말을 붙였다. 김경은, "정동원과 '패밀리가 떴다'가 부른 '이 풍진 세상을'은 어떤 노래?", 조선일보 2020.2.17,

 

3] 이 노래의 가사는 시치리가 하마 해변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12명의 여학생을 애도하는 내용으로 미스미 스즈코(三角錫子, 1871-1921)라는 여교사가 지은 진혼가(鎭魂歌)였다. 오소운 목사, "희망가", 맹꽁이의 찬양 블로그.

 

4] 경향신문, "소프라노 홍혜란 “나에겐 오래된 약속…이제 아빠 향한 사랑 고백 ‘희망가’ 불러요” - 세계적 명성 소프라노 홍혜란 한국 가곡 12곡 담은 음반 발표, 20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