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누구나 비슷한 꿈을 꾸곤 했다. "마스크 안 쓰고 다른 나라를 맘껏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으면~"
나는 아주 오래전에 제임스 골웨이[1]가 플루트를 연주할 때 아일랜드의 풍광이 배경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핸드 헬드 카메라로 또는 비행기에서 촬영한 양떼가 노니는 푸른 풀밭,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 그리고 정감 넘치는 마을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비쳐줬다. 바로 아일랜드의 시골 풍경이었다.
어느날 Netflix에서 그와 비슷한 경치를 보고 바로 채널을 고정시켰다. 바로 Finding You 라는 2021년 로맨스 영화였다.
원작은 제니 존스의 There You'll Find Me 라고 했다. "거기서 나를 찾게 될 거야"는 말처럼 어떤 반전도 없이 스토리 전개가 충분히 예측가능한 영화였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친오빠가 몇 년 전 그림 일기장에 십자가 묘비를 그려놓고 누이동생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었을까 그 동생이 그림 속의 묘비를 찾아나선다는 게 기본 줄거리였다.
어찌 보면 미스테리 드라마 같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맺는 전형적인 '교회오빠' 이야기인 셈이었다.
영화의 줄거리
맨해튼 음악학교의 오디션에서 불합격한 핀리 싱클레어(로즈 레이드)는 기분전환을 위해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어머니 말씀처럼 친오빠가 아일랜드에 다녀온 후 좋은 의미에서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을 보았기에 선뜻 교환학생 신청을 하고 아일랜드로 떠난다. 6시간 반이나 걸리는 더블린행 이코노미 석에 앉으려는 순간 승무원이 다가와 한 자리 남은 일등석 좌석으로 업글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이게 무슨 뜻하지 않은 행운인가" 놀랄 새도 없이 자리에 앉으니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는 왠지 낯이 익은 듯 싶다. 바로 기내잡지 표지에도 등장한 인기 영화배우 베켓 러시(제디디아 구데이커)가 아닌가! 그러나 핀리는 공룡과 싸우는 기사가 등장하는 팬터지 무협영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 만큼 비록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자기도 모르게 잠을 자기도 했지만 그와의 대화는 생뚱 맞고 시큰둥하기만 하다.
4년 전 오빠가 묵었던 민박집이 에어비앤비 숙소가 되어 그 주인 부부가 딸과 함께 공항에 마중을 나왔다. 옆자리의 청년이 팬들에 둘려싸여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것도 보았지만 관심 제로다. 그를 언제 다시 만나랴 싶어 눈길도 주지 않고 해변가 마을로 가서 숙소에 짐을 푼다. 바이올린도 들고 온 만큼 연습도 충분히 할 작정이다.
이튿날 아침 음식 준비를 하다가 옷을 망친 민박집 주인 부부를 대신해 핀리가 식당의 손님에게 아침식사가 담긴 접시를 갔다 주기로 한다. 그런데 그 손님은 영화배우 베켓이 아닌가! 그도 역시 "나를 스토킹하는 거냐"며 깜짝 놀라지만 핀리는 떳떳하기만 하다.
알고 보니 베켓은 공룡이 나오는 중세의 무협영화 마지막 시즌 촬영을 위해 중세의 성곽과 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 그 마을의 민박집에 홀로 머물고 있는 터였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 두 남녀 주인공은 또 "어디서 무엇이 되어 서로를 찾게 될까?"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스토리 전개가 너무 뻔한 것 같아 별 긴장감이 없었다. 그 대신 비슷한 내용을 전에 본 적이 있는 기시감(旣視感)에 "그게 무슨 영화였더라" 기억을 되살려 퍼즐을 맞춰보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를 보고난 뒤 데자뷰(déjà vu)를 느끼리 만큼 익숙하였던 장면과 스토리를 열거해본다.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인공지능(AI)으로 만든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만일 독서와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래의 정보보다 훨씬 더 공통점이 있는 영화로서 입력할 데이터가 많을 것이다.
* 거의 맹목적으로 아일랜드에 가서 자기의 뜻을 이루려 하는 여주인공과 까칠한 아일랜드 사람이 결국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에 빠진다.
→ 프러포즈 데이(Leap Year, 2010): 아일랜드의 풍속에 의하면 윤년의 2월 29일에는 여자도 남자에게 청혼을 할 수 있고 남자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무심한 남친이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나 있는지 더블린으로 출장을 떠나버리고 여주인공(에이미 애담스)은 무작정 더블린으로 남친을 찾아간다. 하지만 비행기가 기상 악화로 다른 공항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까칠한 아일랜드인 셰프의 차를 얻어타고 더블린으로 서둘러 간다. 우여곡절 끝에 더블린에서 남친과 해후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는 남친이 아니라 시종 다투기만 했던 상남자 셰프였다.
* 남자 주인공이 입에서 불을 뿜는 사나운 용에 맞서 공주를 지키고 그녀의 사랑을 얻는다.
→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2003): 사나운 용이 흉칙한 모습의 엘프 대군과 함께 공주가 있는 성을 공격한다. 주인공은 숫적으로 열세임에도 목숨을 걸고 싸워 공주의 아버지 국왕의 신임을 얻는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임에도 대본을 같이 읽으며 조언을 해준 민박집의 옆방 투숙객 핀리와의 사이에 믿음과 애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 배캣 러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손에 이끌려 뭣도 모르고 아역배우를 시작했다. 지금도 매니저인 아버지가 이끄는 대로 영화에도 출연하고 팬덤 유지를 위해 아버지가 맺어준 상대 여배우와도 염문을 만들어내야 한다.
→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 1939)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은 주디 갈랜드의 일생을 다룬 다큐 영화 Judy (2019). 미국의 유명 팝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아버지의 후견인 지위를 다툰 실화를 소재로 한 Netflix 영화 Britney vs. Spears (2021): 연예인의 인기를 관리해준 답시고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출연/공연 작품을 결정하고, 심지어는 연애와 결혼까지도 통제하려 드는 이기적인 가족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 행각이 적나라하게 비쳐진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경우 딸을 착취하고 정신미약으로 몰아 그녀의 결혼생활마저 파탄에 이르게 한 그녀의 아버지를 보다 못해 그녀의 팬들이 아버지의 후견인 지위(conservatorship)를 박탈하기 위한 소송을 벌인다.
* 양로원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는 왕년에 한 미모 했던 스위니 할머니(아카데미 등 온갖 영화상을 휩쓸었던 베네사 레드그레이브)가 동생과의 오해를 풀고 생을 마치게 된다.
→ 영화 노트북(2004): 치매로 과거의 기억을 잃고 남편인 노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앨리는 옛날 노트북을 읽으며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옛 시절을 회상하며 서로 손을 맞잡는다.
*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우(핀리 싱클레어 역을 맡은 로즈 레이드)를 내세워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 Phantom Thread (2017): 상류층 상대의 고급 의상실 우드콕의 오너 겸 디자이너인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갔다가 그곳 식당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여종업원 알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레이놀즈를 따라 런던에 온 시골처녀 알마는 자기만의 특기를 발휘하여 레이놀즈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에서도 뉴욕에서 온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여학생 핀리 싱클레어가 현지의 괴짜 노인 피들러로부터 바이올린 연주에 자기의 감정을 싣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나서 마을 축제에서 인기 배우인 베켓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십수년 간 아들의 인기와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와 그에게 매달리는 상대 여배우의 만류도 뿌리치고 베켓은 핀리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뉴욕에서 평범한 대학생으로 인생을 재출발한다.
* 숨 막히리만치 절경을 자랑하는 모허 해안절벽(Cliffs of Moher)을 같이 보고, 서민들의 애환이 넘쳐나는 카페 바에서 함께 떠들고 춤을 춘다. 마을의 축제에서 남녀 주인공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입맞춤을 한다.
→ 히치콕 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 Rebecca (2020): 미국인 부호의 비서가 되어 프랑스 리비에라 호텔에 머물던 고아 처녀(릴리 제임스)는 '굴'요리를 계기로 그 호텔에 홀로 여행온 영국 귀족 맥심 드 윈터의 관심을 끌고 데이트 신청을 받는다. 그녀는 여주인이 감기로 몸져 누운 틈을 타서 주변 관광지로 그와 함께 놀러 다닌다. 결국 맥심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영국의 맨덜리 저택으로 간 그녀는 숲과 목초지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목장과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해안의 절경에 매료되고 만다. 미스테리한 前 부인 레베카의 행적에 의심을 품고 있던 중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된 남편 맥심의 구명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 핀리는 오빠가 마지막 그림 일기장에 한 쪽 귀퉁이가 부서진 십자가를 그려놓고 왜 자기 이름을 적어 놓았는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 댄 브라운의 소설[2]에서 주인공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기호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랭던 교수(톰 행크스)이다. 그는 범인이 남긴 이상한 암호 같은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을 구하는 클라이언트/수사관에게 불려갔다가 매번 예상치 못한 위험에 빠지고 만다.[2]
이 영화에는 다른 영화에서는 엿볼 수 없는 특이한 소재를 격자(Picture in picture) 소설처럼 다루고 있다. 아일랜드 시골의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온 핀리가 선택한 과목은 아일랜드학(學)이었다. 교수가 무작위로 지정해준 아일랜드 사람을 만나 그의 삶이나 말 속에 들어있는 아일랜드적 요소를 찾아서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양로원에 기거하는 어느 할머니를 찾아갔지만 면담조차 거절 당한다.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는 핀리의 요청에 담당교수는 다른 학생들의 이의와 교체요청이 쏟아질 것이라며 단번에 거절한다.
마침내 핀리는 담당 간호사와 베커 러시의 도움을 받아 그 할머니의 기가 막힌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아일랜드의 전형적인 민낯이 드러난다. 아일랜드 남성은 격정적이고 술과 도박을 좋아하며 가정내 폭력도 불사한다는 것, 아일랜드 사람들은 약자를 한없이 동정하며 남을 돕더라고 결코 생색을 내는 법이 없다는 것, 심지어는 오해를 받는 일이 있어도 그가 들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끝내 참고 견딘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민박집을 운영하는 부부가 게스트 하우스(Air BNB)를 운영할 때 투숙객이 남기는 후기(review)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블로그나 인스타 같은 SNS가 서비스업의 주된 마케팅 수단이 된 우리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끝으로 베커가 좌표를 찍어준 공동묘지에서 그림 속의 십자가 묘비명을 발견한 핀리는 오빠가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해주려 했는지 알고 눈물 짓는다. 자기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빠는 동생이 오디션에 실패하고 처음 해보는 연애에도 상처 받지 않을까 염려되어 성경말씀을 인용하는 대신 그 말씀이 새겨진 묘비명(epitaph)을 동생에게 직접 찾아가 보라고 문제를 내준 것이었다.
The LORD Himself goes before you, and will be with you. He will never leave you nor forsake you. Do not be afraid; Do not be discouraged. 주께서 앞서가며 함께 하시고 절대 너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도 낙담하지도 말라. [3]
결국 원작 소설의 제목 There You'll Find Me 에서 발견한 것은 '금발의 전사'(Fair Warrior, 핀리 싱클레어란 이름의 아일랜드식 해석)도 되고, 무슨 일에도 낙담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 그곳(There)는 어디일까?
이 영화의 주된 로케이션 장소는 뉴욕이나 더블린 같은 대도시도 나오지만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운 아일랜드의 칼링포드(Carlingford)가 주된 무대였다. 지도를 찾아보니 북아일랜드와 접해 있는 영국 쪽 해안의 작은 마을로 중세 때에는 존 왕(King John, 1210)이 친히 방문하는 등 제법 번창하던 고을이었다고 한다.
Note
1] 제임스 골웨이(Sir James Galway, 1939~ )는 노던 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 플루트 연주자(virtuoso flute player)이다. 여기 소개한 뮤직 비디오는 필자가 생애 처음으로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를 장만하고 함께 구입한 레이저 디스크에 수록된 앨범(James Galway and The Chieftains in Ireland)이었는데 그 배경으로 아일랜드 시골 및 해안 풍경, 주민들의 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골웨이는 프랑스의 플루트 대가 쟝-피에르 랑팔에게 사사받기를 청했으나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다는 칭찬을 들었다. 카라얀의 오디션에 합격해 베를린 필하모니커의 플루트 수석주사로 활동하다가 1975년 솔로이스트로 전향했다. 골웨이는 자부심을 갖고 'Irish'임을 밝히곤 했는데, 골웨이는 아일랜드의 대서양 쪽 지명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골웨이는 플루트 고전음악은 물론 현대음악도 대중에게 널리 소개하였으며, 이러한 플루트 연주와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목관악기 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2] 랭던 교수는 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 「로스트 심벌」, 「인페르노」, 「오리진」에 모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실력과 인품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는 없는 종교기호학 교수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냈다.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은 드렉셀 대학교의 활자기호학(typography) 전공 존 랭던(John Langdon)교수라고 한다. 존 랭던 교수는 실제로 「천사와 악마」 소설에 나오는 일루미나티의 엠비그램을 디자인했다. 출처: 나무위키, 로버트 랭던.
3] "강하고 담대하라.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discouraged, for the LORD your God will be with you wherever you go."는 모세가 여호와에게 해준 격려의 말씀이었다. 여호수아 1:9. 다윗 왕 역시 솔로몬 왕자에게 성전 건축을 맡기며 똑같은 말을 했다. 다윗은 그가 믿었던 것처럼 "여호와가 솔로몬에게 늘 함께 하시며 버리지 않으실 테니 낙담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역대상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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