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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을날의 서정

Whitman Park 2023. 11. 14. 11:00

11월이 되었구나 했는데 벌써 중순에 접어들었다.

이맘 때면 Yanni의 아주 경쾌하면서도 웬지 쓸쓸한 'November Sky'를 즐겨 듣곤 한다. 함께 감상하는 YouTube 뮤직비디오에서는 황홀하리만치 온통 붉은 단풍으로 물든 가을 풍경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모임이 있어 찾아간 경복궁 옆 자하문로에도 은행나무 가로수가 아름다운 새 옷을 입었다. 아니 절정이 지난 후였다.

이 거리는 코로나 거리두기가 끝난 후 수많은 관광객들로 시내에서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가 되었다. 주말이면 북한산 오르는 컬러풀한 등산복 차림의 시민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Season of Abundance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로숫길에서 은행나무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 모처럼 풍성한 노란 은행잎을 보니 아주 반가웠다.

게다가 가로수 겨우살이를 위해 헝겊을 둘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눈사람, 인형 같은 예쁜 장식을 붙여 놓아 눈길을 끌었다.

 

수천만 년간 응축된

생명력이 은행잎 안에,

노란 은행잎은 가장 아름다운

가을 배경색 

Tens of millions  of  years

have been condensed

inside yellow ginkgo leaves.

The most beautiful

background in autumn

is those yellow ginkgo leaves.

 

* 경복궁 옆 자하문로의 은행나무 가로수

Season of Rearrangement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지만 그 동안 벌여놓았던 일들,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고 겨울을 맞는다면 추위를 견디기도 어렵고 다가오는 새해를 두 팔 벌려 맞지 못할 것이다. 마침 친구가 보내 준 시 한 편을 읽고 전율을 금치 못했다.
어느 시인이 해질 녘 아무르 강가에서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며 어둠을 밝히는 한 그루 촛불나무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초저녁별로 피어나는 자신을 발견한다.

 

반드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아무르 강(흑룡강)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러시아 민요 "아무르 강의 물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몰라도.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아무르 강은 일제하에서처럼 독립운동을 하거나 오늘날 한국에서 많이 필요로 하는 콩을 경작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아무르 강이란 뭔가를 희생하고 정열을 불태워야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큰 곳이라 하겠다. 시 '아무르 강가에서'로 2004년 소월 시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 무슨 의도에서 이 지명을 제목으로 택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프랑스어 'amour'(사랑)가 먼저 연상이 되었다.[1]

 

그런데 이 시를 영어로 옮기면서 되풀이 읽고 또 읽었더니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일어났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러시아의 강변이 상상이 되는 게 아니라, 뭔가를 상실하고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던 어두움이 점차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응축되어 가슴에 맺혀 있던 것을 강물 위로 내던져버리고 싶어졌다. 

말로만 듣던 맺혀 있던 '감정의 카타르시스(Catharsis)'가 내 가슴 속에서도 일어난 것 같았다. 그렇구나! 시인은 실연(失戀) 의 아픔을 'Amour' 강가에서 정리하였는데, 나는 종심소욕(從心所欲)의 나이가 되도록 가슴에 묻어둔 것을 비로소 꺼내본 심정이 되었다.

 

* 해질 녘 강변. 사진출처: 행복지기 Naver 블로그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아무르 강가에서  -  박정대

By the Amur River by Park Jeong-dae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 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By the river where you left me,

It's been a while since I saw the sunset.

It's still too early for the stars to rise in the early evening.

At the border of distant time when the day turns into night

I wandered for a long time like a nomad.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Beyond the flimsy stakes of border of longing without reflection,

The lights of houses flickered and sprouted under my feet.

Darkness was creeping in piecemeal and collected. It’s darkness underfoot.

The darkness above my head, the darkness piled on my ribs,

I wanted to light my body and burn myself into a candlelight tree.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겁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 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By the river where you left me,

When I burnt for a long time, I’ve found a stone inside me.

Being heated up and, at last, into the darkness I'm looking at,

I felt like it will bloom as one of the evening stars.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2]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But it's still too early for the stars to rise.

In the evening on earth, when only the petals of luminous trees sprouted white,

Keeping the memory of Buddha’s Crystal Palace at Jeongamsa Temple,

I wandered the banks of the Amur for a long time.

I walked towards the light of stars, and found they were blooming at night.

 

Season of Recording

가을이 깊어지면 나무들의 잎새는 광합성을 중단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시인은 나무가 지난 여름에 했던 일을 바람이 불러주는 대로 잎새에 사연을 받아적었다가 단풍 지는 가을이 되면 땅으로 떨군다고 했다. 그러므로 떨어지는 잎새는 마치 우편엽서와 같다. 훌륭한 사연이 적혀 있으면 곱게 주워서 책갈피에 꽂아놓을 일이다.그 책갈피에는 아마도 갈 길을 열심히 걸어갔던 그대가 임무를 마쳤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내 앞에 서 있는 나무의 잎새마다 이러저러한 사연이 적혀 있을 터. 그러니 저 나무들은 모두 다 갖가지 사연을 담은 붉은 우체통처럼 보이는구나! 

필자 역시 이 블로그에 11월 조락(凋落)의 계절이 되면 센티멘털한 사연을 많이 올려놓았음을 새삼 깨달았다.[3]

 

* 온통 붉은 사연을 담은 채 땅에 떨어진 낙엽. 사진출처: Yanni의 MV 'November Sky' 마지막 장면.

 

기별(奇別) - 윤성택

Correspondence by Yoon Seong-taek

 

나무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람이 불러주는

사연을 받아 적는 것은

잎새들의 오랜 관습이다

여름 지나 빛 바랜 가을이 오면

엽서 한 장

그대에게 받을 수 있을까

잎새를 우표처럼 떼어내

책갈피에 꽂는 날이면,

걷는 이 길 끝 그대가

서 있을 것만 같아

나무들은 온통

붉은 우체통을 꿈꾸는데

The trees move ahead and behind each other

The wind is dictating

A story which shall be written down

By leaves as a long-standing practice for them.

When the summer passes by, and the faded autumn comes,

There remains a postcard.

May I get it from you?

Taking a leaf off like a stamp,

I’m going to place it as a bookmark.

Then, at the end of this walk, it’s you.

I feel like you’re standing waiting for me.

The trees are all over the place

Dreaming of a red mailbox.

 

⇒ 우리의 아름다운 시와 노랫말을 영어로 옮긴 것을 더 많이 보려면 이곳을 탭하세요.

 

Note

1] Amor는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며 여기서 이탈리아어 amore, 프랑스어 amour가 유래하였다. Amore mio는 이탈리아어로 '내 사랑' 연인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무르 강가에서'란 해질 무렵 강가에서 서성이며 나를 떠난 연인을 생각하고 (Amor  Amur) 이 시를 읊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뒤에 나오는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이나 '정암사 적멸보궁'과 "쉽게 다가갈 수 없다", "영원히 잊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2013년 우리나라에서는 느닷없이 가요계에 니체의 명언 "Amor Fati"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산다는게 다 그런거지. 누구나 빈손으로와 소설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자신에게 실망 하지마. 모든걸 잘할 순 없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 인생은 지금이야. 아모르 파티~."

 

2] 정암사(淨巖寺)는 신라 시대 자장율사가 진신사리 (眞身舍利) 를 모셔다 선덕여왕 14년(645) 태백산에 창건한 사찰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 당우(堂宇) 가운데 하나를 말한다. 오대산 상원사에도 적멸보궁이 있는데 불전에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시인이 아무르 강가에서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다가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어 태백산 정암사에 있는 적멸보궁에 이르렀다. 아마도 연인과 함께 태백산 정암사에 갔다가 왜 사찰에 부처님 본존불이 없는지, 적멸보궁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3] 필자의 경우에도 블로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특히 코로나 거리두기가 강화되었을 때 아래와 같이 11월 가을의 서정(敍情, lyricism, sentimentalism)을 많이 기록해 두었음을 알았다.

* [2022] 시민의 숲오대산 단풍 구경Autumn in Life11월의 시인생 시

* [2021]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낙엽도 꽃이 되는 계절

* [2020] 가을의 어느 주일날사랑하는 마음과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