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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인연'이 좌우하는 우리 삶

Whitman Park 2024. 1. 30. 10:30

KBS 1FM <윤유선의 가정음악>의 [아침의 가정법, 만약에] 시간에 피사로와 그의 부인 이야기를 들었다. 배우 윤유선 씨가 들려준 피사로의 이야기는 놀랍고도 새로웠다.

초등학교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모네, 세잔 같은 인상파 화가를 알기도 전에 '사진 찍은 것 같은' 풍경화를 그릴 때마다 피사로의 달력 그림을 교본으로 삼고 있었음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 초등학교 시절 내가 크레파스로 그렸던 곤지산 아래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 전경 (1964)

 

윤유선 씨가 들려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피사로가 보불전쟁을 피해 런던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프러시아 군이 주둔해 있던 그의 집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20여년간 그렸던 그림을 창고에 숨겨 놓았는데 상당수를 훔쳐갔고 대부분 훼손돼 있었다고 한다. 동네 여인들이 눈에 익은 그림을 두르고 다녔는데 그의 그림을 잘라서 치마나 에이프런으로 만들어 입은 것이었다.

그림은 팔리지 않고 자녀가 속속 태어나자 생활이 몹시 궁핍하여져 맨발로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부인이 억척같이 식구를 먹여 살리고 피사로가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피사로는 예순이 넘어서야 작품이 인정을 받았고 생활도 윤택해져서 비로소 그간 아내의 노고에 보답할 수 있었다.

 

윤유선 진행자의 가정법은 "배우자가 현재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을 나는 얼마나 또 언제까지 나누어 짊어지고 그(녀)를 격려해줄 수 있는가"에서 출발한다. 그때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카미유 피사로, 포앵트와즈(Pointoise)의 호밀밭 (1877)

 

인터넷에서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피사로가 결혼하겠다면서 부모에게 데려온 여자는 마을에서 조그만 포도원을 가꾸는,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하녀의 딸 줄리 벨라이(Julie Vellay)였다. 물론 피사로의 부모는 격렬히 반대했으나 피사로가 설득하여 피난지 영국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피사로 부부는 일곱 자녀를 두었는데 루시엥(Lucien Pissarro)을 비롯해 그 중 여섯이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며 유명 화가로 성장했다.

피사로는 카리브 해의 세인트 토마스(현 버진아일랜드)에서 태어났는데 그 당시 덴마크의 영토였기에 그는 덴마크 시민권자로서 보불전쟁에 징집되지 않았다. 

피사로는 인상파 그룹의 연장자로서격렬한 토론이 벌어질 때마다 중재 역을 맡곤 했다. 특히 모네, 르누아르, 세잔과 친했고 반고흐와 고갱은 그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에 매료되어 색상과 구도 등 실험을 하고 인상파 동료들에게도 소개했다. 런던 피난 시절에는 영국의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와 교유를 하면서 영국의 화풍을 연구하고 그의 작품에 반영했다. 

피사로는 파리의 유명 화상(畵商) 폴 뒤랑루엘(Paul Durand-Ruel)에게 그의 그림 판매를 맡겼는데 뒤랑루엘은 그에게 도움이 될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는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야외에 나가서 그림을 그렸는데 만년에 안질을 앓게 되어 더 이상 밖에 나가 햇빛 아래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 대신 호텔 같은 높은 건물의 창가에서 도심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유대인이 보유한 피사로의 그림은 나치 독일의 집중적인 약탈 대상이었다.

 

*카미유 피사로,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르街 (1897).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얼마 전 YouTube의 사연 들려주는 채널(썰을 사랑하는 남자)에서 들었던 기막힌 이야기가 생각났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공부를 잘해 학교 선생님과 주위의 도움으로 미국 하버드 대에 유학했던 청년이 귀국 후 직장을 다니면서 보육원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청년은 연상의 여인을 만나 흠모하게 되었다. 남 모르게 선행을 하는 그녀에게 반해 결혼을 결심하고 여친을 소개하자 어머니는 결사반대를 하였다. "너는 하버드 대를 나와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데 고졸에 음식점을 하는 연상의 여자라니 절대로 안 된다."

청년이 가까스로 모친과 여친을 설득하여 두 사람이 서로 만났는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홀어머니는 청년을 가르치기 위해 안해본 일이 없었다. 마지막 6년은 어느 식당 주방에서 일했는데 여친이 그 식당의 주인이었다. 청년의 미국 유학 중 생활비가 부족한 것을 알고 모친에게 아들 장학금이라며 거금을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인연(因緣)이 있으면 서로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 또 식당 사장님이 주방보조의 아들과 결혼할 수도 있다. 그것도 은혜를 베풀고 보답하는 식으로.

 

피사로의 생애를 보면 화가로서의 삶이 일정한 패턴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역만리 신대륙 카리브 해의 작은 섬(Saint Thomas)에서 태어났지만 더 넓은 활동무대인 파리로 옮겨가서 살았고 그림 공부를 하는 동안 여러 화가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작품 성향을 결정할 여러 계기를 능력껏 활용하였다.

그에게 영향력을 미친 것은 일찍이 일본 우키요에를 접한 것, 시대를 앞서간 인상파 화가들과 평생지기가 된 것, 피난살이 중 영국 풍경화가들과 교유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성공한 것은 그동안 가까이 알고 지냈던 순박하고 생활력 강한, 주방 집사(우리 식으로 식모)의 딸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림 한 점 팔리지 않는 무명 화가였음에도 그의 실력을 믿고 그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육아와 가사에 온힘을 쏟았던 그의 부인(사진)이 아니었으면 피사로가 오늘날 '인상파의 비조(鼻祖)'로서 추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전에 소개한 바 있는 스웨덴의 국민화가 칼 라르손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무국적자인 그와는 달리 신분 차이가 큰 부인의 헌신적인 내조를 받았던 세간티니도 연상되었다.

그리고 피사로의 삶이 초년에는 비교적 유족하였음에도 그가 자립할 20-30대에는 명성을 전혀 얻지 못했다. 결혼한 후에도 생활고가 계속되었으나 50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60대에는 그의 그림이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러나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누낭염과 배뇨장애(전립선 비대증으로 인한 요로폐색)가 심해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흔셋에 타계한 그의 삶은 10년 단위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의 자녀들이 어버지가 하던 일을 계승하여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가 친밀하게 지냈던 모네와 세잔은 누리지 못한 축복이었다.

 

나에게도 가정법(What if . . . ?)을 적용해보니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만약에 그림을 계속 그렸더라면 풍경화 전문 화가가 되었을까? 아니면 안도 다다오 같은 건축가가 되었을까?

그 당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화가의 길을 포기한 것이 과연 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인생의 행로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고, 젊었을 때 선망해 마지 않았던 해외 유학길에도 올랐을까?

결정적인 시기에 나에게  도움을 준 이(이른바 '貴人')는 누구인가?

 

'만약에'로 돌아본 우리 삶은
실망 또는 안도(安堵)

'What if' renames
our life in the past
as let-down or feeling relie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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