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권에서는 "국회의원의 특권을 내려놓아라", "당대표 직을 내놓아라", "[탄핵을 할 테니] 장관/검사 직을 내놓아라" 등 사퇴를 요구하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이 그 동안 정치권의 그릇된 관행과 잘못된 사회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정풍(整風) 운동이라면 국민의 입장에서는 고무적이다. 그 결과 물러난 사람의 빈 자리에 새로운 혁신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앉아야 할 것이다.
며칠 전 풍류를 즐기는 친구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며 월산대군(月山大君 李婷, 1454-1488)[1]의 시조 한 수를 보내왔다. 우리 시에서는 아주 드물게 각 행이 고어체이긴 해도 'ㆍㆍ노매라'로 끝나는 아름다운 시조였다.
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들이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無心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그 분위기가 지난 달에 소개한 김득신의 "용산에서(龍湖)"와 아주 흡사하여 영어로도 옮겨 보았다.
그랬더니 행간에서 묘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이를테면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한 만큼 제발 작자의 본심을 알아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When night falls on the autumn river,
the water is getting cold.
I tried fishing again and again, but
few fish responded to my angling.
With nothing but moonlight on board,
I came rowing an empty boat.
[첫 줄] 별 볼 일 없는 내 주변에는 찬 바람만 부는구나 하고 깨닫는다.
[둘째 줄] 아무리 힘을 써봐도 유력한 사람은 모이질 않는 세태를 한탄하고 있다.
[마지막 줄]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것은 무심한 자연 뿐이고, 그 성과는 빈 것(空)임을 고백하고 있다.
때마침 블로그 <한사람 시와 마음>을 운영하는 친구가 같은 월산대군의 한시(漢詩)를 동창 카톡방에 올렸다.
이것 역시 위의 시조와 같은 맥락이었다.
寄君實 - 月山大君 李婷
'군실'에게 부치다 - 월산대군
Attention: Gunsil Friend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思君意不盡
千里大江流
나그네 숙소의 희미한 등불은 새벽을 알리고
쓸쓸한 고장에 가을을 부르는 가랑비가 내린다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끊이질 않으니
천리 길처럼 강물이 흘러 가는구나
[제1행] 권부(權府)를 벗어나 이곳저곳 떠돌다 보니 새벽까지 잠 못 이룰 때가 많구나.
[제2행]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 쓸쓸하기만 한데 가을을 재촉하는 비마저 내린다.
[제3행] 그래도 나와 흉금을 터놓고 밤 세워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그대 뿐인데
[제4행] 서로 풀어놓을 사연이 하도 많아 저 강물처럼 천리 길도 흘러가겠구나.
이러한 해석과 의미를 담아 위의 시를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포부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애절함이 느껴진다. 행여 유력인사가 접근해 올까 두렵고 마음을 나눌 친구도 옆에 둘 수가 없으니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In the travelors' lodging, faint lanterns announce the daybreak.
In the lonely town, a drizzle of rain foretells the advent of fall .
Since my heart never ceases to think of you,
It flows a thousand miles away like a river.
월산대군은 매우 지혜로웠으나 그가 받았을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이루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월산대군은 시문(詩文)에 탁월하다는 명성을 조선은 물론 중국에도 드날렸지만, 오호애재(嗚呼哀哉)라, 35세의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요즘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인사들은 어떤 심정일까? 반박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겠지만, 누가 말했듯이, 자신의 달(月)이 초승달에 가까운지, 보름달을 넘겼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반대 세력에 맞서다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위의 시조와 한시를 읽어보면 보름달이 지났음을 깨달은 시인은 달빛을 벗삼아 억울한 심정을 애써 다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친구 군실에게 하소연하는 심정을 담아 강물에 띄워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억울한 심정을 담은 시가라도 남긴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새로운 계기가 닥쳤을 때 마치 암호문을 해독하듯이 그의 마음을 헤아린 사람들이 지지를 보낸다면 권토중래(捲土重來)의 희망을 품을 수도 있지 않을까!
獨坐敬亭山 - 李白
衆鳥高飛盡,孤雲獨去閒。
相看兩不厭,只有敬亭山。
많은 새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버리고
하나 남은 구름도 점점 사라지고 있네.
서로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은
오직 징팅산(敬亭山) 뿐이로구나.
Sitting Alone in Mount Jingting By Li Bai
translated by Wen Xin Jiao (文心交)
Flocks of birds vanish into thin air,
A lonely cloud drifts away at leisure.
Looking at each other without boring each other,
Is nobody else but Mount Jingting and me.
또 다른 친구가 위와 같은 이백 (太白 李白, 701~762)이 쓴 송년시를 보내왔다.[2]
이상의 설왕설래를 종식시키는 지혜롭고 진중한 조언이라고 생각되었다 .
이 시에서는 신세한탄이나 외로움, 괴로움 같은 표현을 절제하고 마음 중심에 항상 우람한 山이 자리잡고 있어 흔들림이 없었다. 오랜 기간 기도와 명상, 마음 수련을 하지 않고선 이를 수 없는 경지임에 틀림 없었다.
Note
1] 작가 이정(李婷, 월산대군, 1454~1488)은 조선 왕 세조의 적장손(嫡長孫)이다. 7대 세조(1417~reign 1455~1468)의 맏아들 의경세자(李暉, 1438~1457, 추존:덕종)의 맏아들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8대 예종(1450~r.1468~1469)이 되었으나 후사 없이 단명으로 붕어하는 바람에 16세가 된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는 두 살 아래의 동생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바로 9대 성종(1457~r.1469~1494)이다.
여기에는 많은 역사적 해석이 뒤따른다. 사실 월산대군은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7세가 되던 1460년(세조6) 월산대군에 책봉되었다. 조선 왕조 개창 후 100년이 되지 않아 왕실의 기틀을 다져야 하는 마당에 세조 임금의 사후에 왕위가 빈번히 바뀌는 것은 왕실의 존망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에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는 당대의 권신 한명회(韓明澮), 신숙주와 상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명회는 본래 개경의 경덕궁을 지키는 하급관리에 불과했다. 칠삭동이라는 별명과는 달리 지모가 출중하여 야심이 큰 수양대군의 눈에 띄어 그에게 '장자방'(한나라 유방의 책사)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가 김종서를 죽이고 왕권을 잡은 데 이어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까지 해결하자 그의 권세가 막강해졌다. 급기야 그의 딸을 예종비로 만들고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되었다.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의 자문에 응한 한명회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왕실과 조정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면 신하의 말에 휘둘리기 쉬운 문약한 월산대군보다 벼락이 쳐도 놀라지 않은 잘산군(乽山君)이 적임이다. 장자 승계의 전통은 이미 무너졌다. 오로지 의지가 굳고 왕위를 오래 지탱할 수 있는 왕자를 임금으로 삼아야 한다."
더욱이 한명회는 지인지감(知人之鑑, 통상 觀相을 보는 일)이 있다고 알려진 한명회에게 월산대군은 단명할 운세를 지녔으니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이 일은 그가 사후에 부관참시를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성종이 즉위하고 그는 그의 딸을 성종비로 만드는 등 권세와 영화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압구정(狎鷗亭) 문제로 성종에 맞섰던 좌의정 한명회는 여러 조정 신하의 배척을 받아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사후 폐비 윤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산군이 그의 묘를 파헤치고 부관참시를 명하는 복수를 감행했다.
2] 李白의 漢詩 <獨坐敬亭山>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鳥兒消失在天空中,現在最後的雲彩也漸漸消失。
我們共坐,山與我,直到只剩下山 。
날아다니던 새들은 하늘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제 마지막 구름도 점점 사라지고 있네.
오직 저 산만 남아 있으니 산과 나, 함께 앉아 있구나.
The birds have vanished into the sky and
Now the last cloud drains away.
We sit together, the mountain and me,
Until only the mountain rem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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