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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으면서 (送夏迎秋)

Whitman Park 2023. 8. 31. 14:00

폭염과 호우, 홍수로 얼룩졌던 여름이 물러가고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다.

정말 선풍기 바람 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던 후꾼한 열기가 이젠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아니 창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외기(外氣)가 선득선득해졌다.

가을은 결실(結實)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열매를 실하게 키운 과일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전북 장수에서 감 농원을 하고 있는 유양수 친구가 보름 전 어린 감나무에 대한 사연을 전해 왔다.

2년 전 농원 가는 길옆의 3년생 어린 감나무가 트랙터에 무참히 짓밟혀 쓰러져 있던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버팀목을 대서 일으켜 세우고 껍질이 벗겨진 곳에는 약도 발라주었다고 한다. 
농원에 오가며 꾸준히 보살펴 주었는데 3년째 되는 금년에는 활력을 되찾아 건강하게 자랐을 뿐만 아니라 올봄 늦서리 냉해로 주변 나무들이 실과(失果)를 하였음에도 여린 가지가 휠 정도로 제법 굵은 감을 4~5개 달고 있다고 사진까지 단톡방에 올렸다.

이 사연을 읽고 여러 친구들이 주인의 신뢰에 보답을 하는 것이라는 둥,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나 식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둥, 상처 입은 어린 감나무를 정성껏 돌봐준 친구에게 대신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 밑둥의 상처가 역력한 어린 감나무에 감이 여러 개 열렸다. 사진제공: 유양수

 

심금을 울렸던 어느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그녀는 태어난 자리를 지키고 오직 하늘을 향해 자라다가 찾아오는 사람에게 여름엔 시원한 나무그늘을, 가을엔 달콤한 열매를, 겨울엔 땔감으로 쓸 가지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겠다고 말했다. 

아니지~. 팬터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는 나무가 걸어다니기도 한다. 나무의 씨앗은 바람에 날려, 새가 먹이와 함께 삼켰다가 전혀 뜻밖의 장소로 옮겨가 싹을 틔우게 된다. 이와 같이 나무에는 사람의 허를 찌르는 의외성(意外性)이 있다.

 

세종시 산림박물관길 금강수목원 입구에는 조병화의 시 "나무"를 새겨놓은 시비(詩碑)가 서 있다.

 

* 금강수목원의 주제를 온몸으로 노래하는 조병화의 "나무". 사진출처: Tistory 시사랑꽃사랑

 

나 무   - 조병화

Tree    by Cho Byeong-hwa

 

나무는 태어난 자리에서, 한평생을

하늘만 바라보며 자라오릅니다

 

나무는 곁의 나무들을 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늘만 보며 솟아오릅니다

 

한 치, 한 치, 하늘이 주시는 치수대로

무리함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무는 다른 나무에 의지하는 일이 없이

봄, 여름, 가을 없이

겨울에도 숨어서

한평생을 하늘만 보면서 스스로를 솟아오릅니다

 

오로지 태어난 자리에서.

Where it was born, a tree grows up, spending whole life,
A tree is only looking up at the sky.

The tree won't see other trees around.
It only looks at the sky and arises.

Inch by inch, according to the mesurement given by the sky,
It grows up with no strain by its own power.

A tree never relies on other trees.
No spring, no summer, no autumn,
It hides itself in winter.
Throughout life, looking only to the sky, it raises itself up.

Only in the place where it was born.

 

* 그린 바로 옆 모래벙커와 연못, 나무 등 삼중 해저드가 심리적 부담감을 안겨주는 어느 골프장. 사진제공: PxHere

 

누구보다도 나무를 사랑했던 시인 조병화(1921~2003)는 나무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경성사범과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한 시인은 물리화학을 전공하였음에도 해방 후 시작(詩作)에 몰두, 총 52권의 시집을 펴냈다. 삶과 죽음, 인생의 본질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를 쉬운 일상의 언어로 풀어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나무에 관해서도 한두 편의 시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철리(哲理)를 진중하게 노래하고 있다.

 

 

나 무 (외로운 사람)   - 조병화

Tree    by Cho Byeong-hwa

 

외로운 사람아

외로울 땐 나무 옆에 서 보아라

나무는 그저 제 자리

한 평생 묵묵히

제 운명, 제 천수를 견디고 있나니

너의 외로움이 부끄러워지리

You, a lonely person,
When you feel lonesome, stand by a tree.
The tree is just in its place
Enduring its fate, its destiny
During its lifetime in silence.
Your loneliness would be ashamed.

나무는 그저 제 자리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긴 세월을

하늘의 순리대로 살아가면서

Those trees are just in their places
Spring, summer, fall, winter, long years
Living according to the order of the Heaven.

상처 입으면 입은 대로 참아 내며

가뭄이 들면 드는 대로 이겨 내며

홍수가 지면 지는 대로 견디어 내며

심한 눈보라에도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않고

의연히 제 천수를 제 운명대로

제 자리 지켜서 솟아 있을 뿐

Tho' they are wounded, they bear the wound.
Even tho' drought comes, they endure it as it comes.
When the floods occur, they endure floods as they occur.
In the fierce blizzards and storms, trees don't fall down.
They willingly fulfill their destiny.
They stand steadfast in their places.

나무는 스스로 울질 않는다

바람이 대신 울어 준다

나무는 스스로 신음하질 않는다

세월이 대신 신음해 준다

Trees don't cry for themselves.
The wind cries on behalf of them.
Trees don't groan for themselves.
The years groan on behalf of them.

오, 나무는 미리 고민하지 않는다

미리 근심하지 않는다

그저 제 천명을 다하고 쓰러질 뿐이다

Oh, trees don't worry beforehand.
They don't fret in advance.
They have only to die and fall.

 

* 용인 호암미술관 경내의 고려청자를 보는 듯한 반송. 사진출처: Tistory 먼.산.바.라.기.

 

그러나 자연에 순응한다고 나무가 모두 무탈하게 자라는 것도 아니다.

올여름 곳곳에서 목격했듯이 나무는 산사태로, 홍수로 뿌리채 뽑혀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잔가지들과 함께 수로를 막아 홍수 피해를 더 키우는 일도 있다.

 

그러나 잘 자란 나무는 늠름한 기상을 보여주고, 많은 나무가 숲을 이룰 때에는 훌륭한 경관과 경제적 이익을 안겨준다.

시인이 꿰뚫어 본 것처럼, 우리도 쉼 없이 높은 것을 지향하면서 사소한 일에는 속으로 눌러 삭이고 4계절 한결 같은 생명력을  보여주는 그런 자세를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나무의 철학   - 조병화

Philosophy of a Tree    by Cho Byeong-hwa

 

살아가노라면

가슴 아픈 일 한 두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감추고

그걸 사는 거다

 

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쉬임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 한 두가지겠는가

 

In the course of your life,
there won't be only one or two heartbreaking incidents.

It hides its roots deep down,
hides its unshakable self,
and stay alive that way.

Spring, summer, fall, and long winter,
It grows up to higher places,
Incessantly to a higher place,
Steadfastly.

If you live that way,
there won't be one or two things breaking your heart.

 

 

⇒ 우리의 아름다운 시와 노랫말을 영어로 옮긴 것을 더 많이 보려면 이곳을 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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