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안녕하세요. 얼마전 우리가 감상평을 나누었던 '퀸스 갬빗' 드라마가 여전히 화제만발이라면서요?
P: 네, 체스를 소재로 한 드라마라고 하니 누구나 거리감을 느낄 법한데 어느 불우한 고아 소녀의 재능 개발과 가족만들기, 세계챔피언이 되는 성공 드라마로 자리매김한 후로 매우 감동적인 몰입도 높은 드라마/장편영화가 된 것 같습니다.[1]
G: 그럼 원작소설의 한계를 뛰어넘은 영화 중에 생각나는 영화가 있으신가요?
P: 네, 마침 코로나 판데믹 시대에 생각 나서 다시 본 영화 'Inferno'(2016)가 그러한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댄 브라운의 'Da Vinci Code'를 원작과 영화 모두 보았기에 'Inferno' 역시 기대가 컸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본 적이 없는 그림, 안가본 곳이 많아서 그랬는지 2013년 출간된 동명의 원작에서는 건성으로 읽었던 대목을 영화에서는 제가 직접 접할 수 있어서 영화의 위력을 새삼 느겠습니다.
G: 저도 전에 그 영화를 보았는데 그 무대가 된 피렌체, 베네치아, 이스탄불 모두 유명한 관광명소라서 요즘 같이 해외여행을 할 수 없는 때 다시 보면 좋을 것 같군요.
P: 원작자 댄 브라운은 책을 낼 때마다 관광 가이드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지요. 등장인물이나 사건, 행사, 스토리는 모두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픽션이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모든 미술품, 문학작품, 과학과 역사는 모두 사실이라고요. 하지만 '다빈치 코드'가 나온 뒤 독자들은 무대가 되는 장소와 예술작품의 인문학적인 설명과 묘사에 열광했습니다.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등 곳곳에서 그 책을 손에 든 관광객들이 줄을 이었다니까요.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관광을 다닐 때에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나가지만 전문가가 동행을 한다면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지요.[2] 하지만 그것도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To see is to believe.)이라고 느꼈어요.
G: 영화 속의 어떤 장면이 그랬나요?
P: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팔라초 베키오의 첨탑, 보볼리 정원 같은 피렌체의 명소나 보티첼리의 '지옥도', 바사리의 '마르시아노 전투' 같은 그림은 책에서 아무리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어도 책만 읽어서는 원작의 구도나 의도를 알 도리가 없었지요. 예를 들어 이스탄불에 실제로 가 본 사람도 영화와 같은 장면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같은 영상을 보여주더라도 다큐 필름에는 없는 주인공의 스토리텔링이 있으니 재미가 배가될 수밖에요.
G: 선생님도 그쪽 분야에 관심이 많고 여행을 많이 다니셨으니 원작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을 몇 가지만 소개해 주십시오.
P: 네, 저는 미국에서 살 때에도 영화의 무대를 직접 찾아가 본 곳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Witness'(1985)와 펜실베니아 주의 랭카스터 카운티 애미쉬 마을, '9 1/2 Weeks'(1986)와 맨해튼의 차이나타운, SoHo (South of Houston St.) 같은 곳 말이지요. '인페르노'에 국한해서 살펴본다면 첫번째로 랭던 교수만이 열고 풀 수 있다는 바이오 실린더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암호가 호기심을 자아내지요. 빔프로젝터에 연결해서 보니 보티첼리의 '지옥도(Map of Hell)'가 나오고 거기 적혀 있는 철자를 연결하니 그 명구가 새겨진 바사리3]의 '마르시아노 전투(The Battle of Marciano)' 그림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다음 문제를 풀 수 있는 힌트(cerca trova)가 나오거든요. 그러므로 책만 가지고는 실물을 상상하기 어협고 베키오 궁전, 500인의 방, 단테의 데쓰 마스크, 베키오 다리의 바사리 회랑(Vasari Corridor), '낙원의 문(Paradise 25)'이 걸려 있는 산죠반니 세례당 같은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아야 합니다
G: 왜 이런 미스터리 스릴러에서는 이렇게 난해한 수수께끼 문제가 나올까요?
P: 남자 주인공을 하버드 대학교에는 실재하지 않는 기호학 교수로 해 놓았으니 문제가 어려울수록 그의 존재감이 살아나는 거죠. '인페르노'에서도 세계보건기구(WHO) 당국이 범인과 범행의 윤곽을 포착했음에도 수수께끼같은 구체적인 실행시기와 방법은 랭던 교수(톰 행크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나라 화성 연쇄살인법 이춘재도 실토하였듯이 사이코 패스는 "나만큼 머리좋은 사람이 아니면 범행의 희생제물이 되어도 좋다"라고 생각한다잖습니까? 셜록 홈즈 같은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들 또한 범인과 탐정/수사관의 지적 게임을 구경하는 데 당연히 흥미를 갖고 있고요. 독자들의 응원도 있으니 선한 정의의 사도가 당연히 이겨야 하는 겁니다. 영화 '조디악(Zodiac, 2007)'에서처럼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지고 말지요. 수수께끼가 어려울 수록 극적인 긴장감은 고조되겠지만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독자들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해요. 특히 장면전환이 빠른 영화의 경우 관객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에 질질 끌려다니게 됩니다. 이런 입소문이라도 나면 흥행은 실패할 수밖에 없지요.
G: 그럼 인페르노 사건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바이러스 감염으로 지구상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설정이니 작금의 코로나 재난을 미리 예고한 것은 아닐까요?
P: 저 역시 코로나 재난 후에 이 영화를 다시 보니 그런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맬더스의 인구론을 신봉하는 천재 유전학자 억만장자 버트런드 조브리스트가 사비를 들여 신종 바이러스를 만들고 전세계의 넘치는 인구를 솎아내겠다는 발상이 바로 이태리에서 현실화 된 것입니다. 우한에서 온 중국 관광객에게서 신종 폐렴 바이러스가 퍼져 나간 결과 이태리에서만 해도 노인층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조브리스트의 예언이 상당히 적중한 셈입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14세기 중엽의 페스트 창궐로 사람이 많이 죽고 일할 사람이 귀해지자 인본주의 르네상스가 일어났지요. 오늘날 코로나 사태로 세계 곳곳에서 공장이 쉬게 되니까 대기가 맑아지고 모처럼 지구가 숨을 쉬게 되었다고들 말하지 않습니까!
G: 소설의 설명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영화를 보아야 제대로 이해가 되는 대목은 무엇이 있나요?
P: 제가 볼 때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의 4마리 기마상에 얽힌 비밀. 그 일을 꾸몄던 베네치아 도제(Doge, 지도자)의 묘가 이스탄불 소피아 사원/박물관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아래 물이 흘러 들어가는 지하 저수장 시스턴 궁전(Basilica Cistern)에서 열리는 음악회라 하겠습니다. 또한 WHO 사무총장(Director-General)의 권한과 위세가 초국가적이고 관련국가는 그의 방역활동에 이의 달지 않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 요즘 상황에 비추어 실감나게 느껴졌습니다. 중세 페스트의 창궐을 막은 것이 백신이나 치료제가 아니라 베네치아에서 고안했고 실효를 거둔 40일간의 의무격리(quarantine) 제도라는 것도 새삼 알게되었고요. 예전에 가 보았던 아드리아해의 베네치아 식민지였던 두브로브니크에서 제일 크고 이색적인 건물이 입국자를 격리 수용하던 건물이라는 것도 생각 났습니다.
G: 이 영화에서 미스테리한 존재가 처음엔 조브리스트의 의뢰를 받고 행동하다가 나중엔 WHO에 협력하는 조직 The Consortium인데요. 원작이나 현실에서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P: 우리는 007 영화 등 스릴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정보와 자금, 무력,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그런 조직을 하도 많이 보았기에 충분히 그런 일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다 믿게 됩니다. 실제로 사설군사조직인 PMC (private military company/ contractor)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아프리카 등지에서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원작이나 영화에서도 유력한 고객의 의뢰를 받아 신변경호는 물론 특정인 납치, 살해 등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이 스토리 전개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공인 받게 된 탐정업이 기업화되면 그런 수준으로 발전하고 연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배가본드'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G: 끝으로 상영시간이나 제작비의 제약으로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이야기에는 무엇이 있지요?
P: 네, 소설의 결말은 영화와 사뭇 다른데 이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끔했던 구절이 있었어요.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는 말로 영화에서는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었어요.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인들이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악을 SALIGIA[4]라고 일컫고 항상 이를 경계하도록 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한 가지 더 충격적인 사실도 있어요. H+ (에이치 플러스)라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설명한 대목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 가능한 모든 기술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철학이지요. 철저하게 적자생존의 원칙에 입각한 논리를 갖추었으며, 트랜스휴머니즘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건 윤리적인 책임 의식을 가진 과학자나 미래학자 같은 믿을 만한 인물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해요. 원작소설에서는 조브리스트가 이 운동의 지도자로 설정되어 있지요.[5] 고도의 지능과 카리스마, 재력을 갖춘 그는 종말론 성향의 글을 발표해 여주인공 시에나를 비롯한 수많은 추종자들을 트랜스휴머니즘으로 끌어들였습니다.
Note
1] '퀸스 갬빗'을 본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왜 여주인공이 공항 가는 차에서 내려 낯선 모스크바 할아버지와 체스 대국을 벌이는지 의문을 갖는 것 같다. 생부로부터 버림 받았던 소녀가 성공을 거둔 다음에 아버지 또는 샤이벨 아저씨 같은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심정을 여실하게 보여준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원작소설과 영화의 장르가 심리 스릴러로 분류되어 있다.
2] 비록 관광지는 아니더라도 VR(가상현실) 및 AR(증강현실) 기기를 이용하면 인문학적 콘텐츠가 풍부할 수록 체험관광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피렌체 베키오 다리는 관광객이라면 찾아가보는 곳이지만 바로 그 위에 베키오 궁전에 드나드는 요인의 신변안전을 위해 만든 바사리 회랑이 있다는 것은 잘 모를 수 있다. 거기에 영화에서처럼 남녀 주인공이 암살자의 추격을 피해 숨가쁘게 도주하는 영상을 함께 볼 수 있다면 왕년의 '포켓몬' 소동이 재연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다양한 관광자원에 인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을 덧입혀 이를 첨단 IT 모바일 기기로 재현하는 경계를 뛰어넘는 노력(interdisciplinary efforts)이 필요하다고 본다.
3] 원작에는 댄 브라운의 박식함을 드러내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좀 길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르조 바사리(Vasari)는 자신의 벽화 '마르시아노 전투' 속에 cerca trova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라는 성경 구절을 숨겨놓았다 (아래 그림 참조).
16세기의 화가 겸 건축가이자 저술가이기도 한 바사리는 세계 최초의 미술사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바사리는 수백 점의 그림을 그리고 수십 채의 건물을 설계하기도 했지만, 그가 남긴 최고의 유산은 아마도 가장 뛰어난 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건축가들의 생애」라는 제목의 기념비적인 저서일 것이다. 이탈리아의 여러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전기를 모은 이 책은 오늘날까지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바사리는 약 30년 전, 베키오 궁전의 500인의 방에 있는 벽화 '마르시아노 전투'의 한쪽 구석에서 ‘케르카 트로바’라는 비밀 메시지가 발견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치열한 전투 장면 속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도 않는 초록색 깃발 위에 이 조그만 글자들이 적혀 있다. 바사리가 왜 이 이상한 메시지를 자신의 벽화에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이론이 분분하지만, 이 벽의 3 센티미터 뒤쪽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프레스코화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단서를 남긴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원작소설의 독자나 영화 관객이라면, 미술사를 전공한, 멘사 회원이기도 한, 박학다식한 작가 댄 브라운이 이것과 단테의 데쓰 마스크를 함께 엮어서 이 소설의 모티브를 구상하였으리라고 쉬 짐작할 수 있다.
4] 라틴어로 Superbia (교만), Avaritia (탐욕), Luxuria (욕정), Invidia (질투), Gula (탐식), Ira (분노), Acedia (나태)의 첫 글자를 모아서 만든 단어이다.
5] 트랜스휴머니즘 추종자들은 두 개의 알파벳과 네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콜사인 같은 암호명(예: DG-2064 등)을 사용한다. 벨기에 태생의 이란계 미국인 FM-2030 (Fereidoun M. Esfandiary)은 Wikipedia에 사진과 함께 생애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설명하는 저서를 여러 권 펴냈고 일찌감치 체외 수정과 유전공학, 문명의 세계화 등을 예견한 미래학자이기도 했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줄리와 줄리아(Julie & Julia, 2009) (0) | 2022.02.21 |
---|---|
유스 (Youth, 2015) (0) | 2022.02.21 |
The Lucky One (2012) (0) | 2022.02.21 |
기적(Miracles from Heaven, 2015) (0) | 2022.02.20 |
기생충(Parasite, 2019) (0) | 2022.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