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민 덕희 (2024)

Whitman Park 2024. 9. 16. 07:00

이 영화는 2024년 초에 개봉되었는데 한예종 영화과 출신의 신예 박영주 감독이 보이스 피싱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하여 여러 가지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같은 해 9월 추석 특선영화로 KBS 2TV에서 방영되었다.

이 영화는 경찰은 물론 금융당국과 금융기관에서도 보이스 피싱 피해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근절되지 않고 있는 전화금융사기 사건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찌보면 과거 보이스 피싱 수사를 하는 경찰의 무능을 고발하고 피해자가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했던 현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보이스 피싱을 당하지 않고 피해를 입었을 때 어떻게 대허해야 하는지 교과서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

어린 자녀를 키우며 세탁소를 운영하던 덕희(라미란 扮)는 화재 사건으로 인해 집과 일터를 모두 잃고 거리로 나앉게 된다. 그때 마침 햇살론을 5천만원 이상 대출해준다는 손 대리(공명 扮, 본명은 '재민')의 전화를 받는다. 그에게 속아 사채까지 끌어다 3,2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보낸다. 손 대리가 일한다는 은행 지점을 찾아갔을 때 그곳의 손 대리가 여성임을 알고 보이스 피싱 사기를 당했음을 깨닫는다. 화성동부경찰서 지능수사팀 박 형사(박병은 분)를 찾아가 하소연하지만 박 형사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처지여서 상대적으로 피해액수가 적은 덕희의 보이스 피싱 사건은 뒷전으로 밀린다.
세탁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덕희는 당장 아이들을 놀이방에 보낼 돈조차 없어 직장 한 구석에 공간을 만들어놓고 아이들을 놀게 한다. 하지만 오지랍 넓은 덕희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한편 취준생 재민은 고액 알바라는 말에 속아 중국 칭다오에 가서 감금 당한 채 일상적으로 폭력에 시달리며 피싱콜을 수백 통씩 걸어야 한다. 야밤에 탈출을 감행하지만, 먼저 도망을 치려다 붙잡혀 들어온 동료가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하고 야구방망이에 맞아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결국 탈출을 포기하고 그가 일하는 곳을 피해자에게 알려 탈출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지부진한 수사를 항의하러 경찰서로 향하던 덕희에게 재민이 몰래 전화를 걸어온다. 재민은 덕희를 진정시켜가며 자신이 일하는 콜센터의 정보를 모두 제보하고 돈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테니 자기를 이곳에서 빼내달라고 말한다. 덕희는 처음에 재민의 말을 의심하고 "왜 수많은 피해자 중에서 하필 나냐"고 묻는다. 재민은 아줌마가 제일  반응이 빠르고 추진력이 있어 보여 그런다고 대답한다. 덕희가 박 형사에게 이러한 사정을 말해보지만 중국에 있는 보이스 피싱 조직 총책의 소재지를 알아야 중국 공안에게 공조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고만 할 뿐이다.
재민 역시 자기가 일하는 곳의 주소를 알 턱이 없다. 다만, 이곳이 중국 칭다오이고 창밖에 춘화루(春和樓)라는 음식점이 있으며 앞에는 미싱이 여러 대 있다고 말해주는 게 고작이다. 재민은 제보를 하기 위해 키보드 영문자판 그대로 cnsghkfn rksvks 3cmd duvrjsant wndrnr cldekdh 라는 메시지를 보내온다. 덕희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끝에 "춘화루 간판 3층 옆건물 중국 칭다오"라고 메시지를 해독해 박 형사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박 형사로부터 콜센터의 정확한 주소가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덕희는 하는 수 없이 구글 맵을 뒤져 춘화루를 찾는데 칭다오에는 같은 이름의 음식점이 72개나 되어  찾아갈 곳을  9개로 압축한다. 박 형사를 찾아가지만, 마침 100억대 전세 사기가 터진 상황이라 덕희가 바짓가랑이를 붙잡아도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던 참에 어린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것을 보다 못 한 누군가가 신고를 해 경찰이 아동학대를 이유로 아이들을 시설로 데려간다. 그때 박 형사가 수사가 종결되었음을 알려온다. 덕희는 경찰이 잡야야 할 놈은 안 잡고 아이들이나 데려간다며 오열한다. 이를 보다 못한 직장 동료들이 덕희를 돕겠다고 나선다. 조선족 봉림 언니(염혜란 분)가 중국어를 잘하고 그녀의 동생이 칭다오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카메라맨을 자처한 후배까지 주말을 이용해 직장은 월차를 쓰기로 하고 함께 칭다오로 떠난다.
한편 재민은 보이스 피싱 소굴을 벗어날 생각에 모아둔 돈으로 팀장을 매수해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운 관리직으로 옮긴다. 천신만고 끝에 사무실 컴퓨터를 이용해 보이스 피싱 관련문서, 피해자 명단과 금액 등을 팩스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수신처는 덕희가 알려준 박 형사가 속한 지능수사과였다. 한밤중에 수백 장의 보이스 피싱 증거자료를 받아본 경찰서에서는 소동이 일어난다. 박 형사도 마음을 고쳐먹고 덕희와 연락을 취하면서 중국 공안에 공조수사를 요청하고 급거 칭다오로 떠난다.   

 

* 중국 칭다오에 있는 보이스 피싱 콜센터 내부


칭다오 보이스 피싱 콜센터에서의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간다. 평소 칭다오 조직원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던 보이스 피싱 총책이 콜센터를 다른 도시로 옮기기로 하고 칭다오 센터의 조직원 숙정을 지시한 것이다. 밤낮으로 콜센터 입구를 지켜보며 박 형사가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던 덕희 일행은 아예 시장통 옷수선가게 미싱을 빌려 재민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덕희는 재민과의 접선에 성공하나 밤새 괴한들이 사무실로 쳐들어가고 여러 사람이 급히 차를 타고 떠나는 광경을 목격한다. 놀랍게도 여러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재민 또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친구의 부축을 받고 나온다. 총책이 다른 도시로 가기 위해 칭다오 공항으로 갔다는 말을 들은 덕희 일행도 무작정 공항으로 향한다.

박 형사도 중국 공안과 함께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했으나 중국  공안의 마약팀이 수사를 맡는다고 하자 크게 실망한다.  총책이 이미 도피한 터에 마약 연관성이 희박하면 중국 측 수사가 흐지부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형사는 현장에 남아 있던 봉림 언니의 통역으로 중국 공안 현장지휘관에게 통사정을 하여 중국 경찰관 2명과 함께 공항으로 간다.

이튿날 아침 덕희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보이스 피싱 총책을 찾지만 섶에서 바늘 찾는 격이다. 여러 사람을 쫓다가 허탕을 치곤 하는데 재민이 보내 준 동영상 속의 총책과 비슷한 손동작을 하는 롤렉스 시계를 찬 신사를 발견하고 그의 뒤를 쫓는다. 그 낌새를 눈치챈 총책이 덕희를 찾아와 그녀가 보이스 피싱 피해자라는 것을 알고  코웃을 치면서 피해액의 3배가 되는 `10만불을 현찰로 줄테니 그만 꺼지라고 겁박한다.
덕희는 총책의 포스에 움찔하지만 사기꾼 주제에 적반하장으로 피해자를 조롱하는 총책의 태도에 더욱 분노하여 그의 면전에 달러 뭉치를 내던진다. 그러자 총책은 덕희를 사람이 없는 화장실로 끌고 가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피투성이가 된 덕희를 뒤로하고 곧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러 가다가 재킷 안호주머니 속의 여권을 덕희가 빼돌린 걸 알아챈다. 급히 덕희가 있는 화장실로 되돌아갔을 때 덕희는 총책에게 한국 사람 '오명환'이었냐면서 여권의 신원 페이지를 뜯고 씹어 삼킨다. 그가 덕희의 목을 조르는 순간 다른 여행자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공항경찰, 박 형사와 중국 공안에게 체포된다.
한국에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한 덕희는 아이들과 재결합하고, 가까스로 한국에 온 재민은 병원에서 한국 경찰에게 범죄조직에서 탈출하고 싶어 제보했다고 진술한다.

* JTBC에 출연한 실화의 주인공 김성자 씨

 

감상의 포인트

이 영화를 보는 한국인 관객들은 빈번히 발생하는 보이스 피싱 사건을 경찰이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피해액이 적다거나, 보이스 피싱 조직의 거점이 중국에 있다거나, 그 총책의 주소를 모른다거나 하는 이유로 수사를 할 수 없다고 잡아땔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바탕이 된 보이스 피싱 피해자 김성자 씨는 영화와 똑같은 이유로 홀대와 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내부고발자가 제보해준 것을 가지고 그녀 스스로 총책의 본명과 인적사항은 물론 그가 귀국하는 날짜와 항공편명까지 중국의 제보자와 지인을 통해 알아재 경찰에 제공했다.  피해자는 "경찰이 못한다면 내가 직접 잡아야겠다"는 각오로 위험을 무릅쓰고 총책의 사진, 은신처 정보, 중국내 사무실 주소, 보이스 피싱 피해자 명단 등을 있는 대로 수집해 경찰에 전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정류장 신에 나온 전단지처럼 보이스 피싱의 결정적 제보자에게 1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경찰은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자의 제보로 총책을 검거한 사실마저 숨겼고 나중에 그것이 문제가 되자 고작 100만원을 지급했다고 한다. 김성자 씨가 이런 사실을 조목조목 항의하자 경찰에서는 자기네가 처리한 것에 법적으로나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잡아뗐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 피해자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청원을 올렸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이 영화가 개봉되어 보통의 시민들과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되면서 비로소 부패·공익신고 포상금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마침내  2024년 8월이 되어서야 정부로부터 포상금 50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정을 고려하면 검수완박법의 시행으로 수사할 일이 크게 늘어난 경찰이 서민들을 범죄로부터 제대로 보호할 수 있을지 적잖이 우려가 된다. 경찰로서는 예산 부족, 인력 부족, 전문역량 부족, 국제협조 미비 등 변명거리가 열 개 스무 개도 넘기 때문이다.

 

* 경찰의 무능 탓에 어쩔 수 없이 시민영웅이 된 덕희 씨

 

이 영화는 보이스 피싱이나 로맨스캠에 관한 가상 체험 교육자료로서도 제격이다.

순간적인 착오와 판단미스로 돈을 갈취 당하곤 하지만 범인을 잡는 것이나 사기 피해를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찰 수사를 기대해서도 안되고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범인이 시키는 대로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은행창구 직원이나 청원경찰의 기지로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뉴스도 종종 접하지만 내가 당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이를 위해서는 설령 보이스 피싱이나 로맨스 캠의 타깃이 되었을지라도 이 영화의 장면 장면을 떠올리면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은행직원이나 검찰 수사관 등을 사칭하고 돈을 보내라고 하는 자가 중국, 나이지리아의 허름한 골방에서 각본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임을 안다면 전화를 끊어버릴 테니 말이다.

 

이 영화에서 일견 평범해 보이는 한국의 아줌마가 놀라운 기지와 실행력을 발휘하여 범인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보기에도 통쾌함을 안겨준다. 영화 속 덕희가 동료들과 직장에 휴가를 내고 중국 칭다오로 가서 범인들과 대결하는 이야기는 허구이다. 실화에서는 김성자 씨가 중국 칭다오에 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덕희가 총책에게 구타를 당할 때 그의 여권을 슬쩍 훔쳐서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찢어 삼키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덕희와 총책의 관계가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이러한 장면을 예술적 라이선스(artistic license)라고 한다. 예컨대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 문법을 파괴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영화가 제작ㆍ개봉됨으로써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될 뻔한 사건이 널리 알려지고 주인공이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된 것 역시 매우 감동적인 스토리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평범해보이는 사건, 장소가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한 이후 의미있게 다뤄진 사례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 <겨울연가>의 무대였던 남이섬,  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온 정동진 해변은 해외에도 알려져 있다.
이런 점이 영화가 가진 매력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1994) 영화가 아니었으면 독일인 사업가가 군수공장에 유태인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들의 목숨을 구한 사실을 아무도 모를 뻔했다. 또 <더 디그(The Dig)>(2021)에서는 영국의  한적한 시골  땅속에 묻혀 있던 고대 유물의 최초 발견자가 박물관 해설판에 기재된 엘리트 고고학자가 아니라 시골의 평범한 영감님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팩트의 오류, 나아가 역사를 바로잡는 것도 '영화의 힘'이라 할 수 있다.